항목 ID | GC042002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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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曺錫賓 |
영어음역 | Jo Seokbin |
이칭/별칭 | 이관(利觀) |
분야 | 종교/기독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종교인 |
지역 | 부산광역시 강서구 생곡동 268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상기 |
[정의]
부산 지역에서 활동한 병인박해 당시의 순교자.
[가계]
창녕 조씨(昌寧曺氏) 감무공파의 30세손이며, 사우당(四友堂) 조이추(曺爾樞)의 6세손으로, 아버지 조대연의 5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순교 당시 함께 참수당한 조석증(曺錫曾)이 동생이다.
[활동 사항]
조석빈(曺錫賓)[1825~1872]은 1825년 경상남도 김해시 삼방동에서 태어났다. 초기 천주교 신자로 동생 조석증과 함께 박해를 피해 문중 선산이 있는 생활리[현 부산광역시 강서구 생곡동]의 배정문(裵禎紋)[정삼품 통정대부, 수원가톨릭대학장 고 배문한(裵文漢)의 증조부]의 동서학당에 은신하면서 유학과 서학의 비교 연구에 힘썼다. 또 한문 성경을 한서 속에 감춘 나무 상자를 메고 양반 집안 등을 찾아다니며 천주학의 전교에 앞장섰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고 2년 뒤인 1868년 조석빈은 동생과 함께 현재의 부산광역시 강서구 강동동 인근에서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동래 아문으로 끌려간 이들은 배교를 강요하는 관헌들의 혹독한 고문을 받았지만,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 김해 왜장대에서 참수당하였다. 이때 조석빈은 두 팔을 옆으로 올려 십자로 서서 미소를 지으며 목이 잘렸는데, 고문을 하는 사람조차도 이들 형제의 굽힘 없는 신앙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묘소]
참수 후 창녕 조씨 집안의 반대로 형제의 시신은 생곡동 선산에 묻히지 못한 채 방치되었는데, 이를 배정문이 자신의 집 뒤 언덕 밭에 암장하였다. 그 후 입으로만 전해지던 형제의 묘지를 순교한 지 120년만인 1989년 6월 19일~6월 20일 천주교 부산교구에서 발굴하였으며, 1995년 5월 29일 생곡 형제 순교자 묘로 성분하여 부산 교구장의 집권으로 단장 미사를 올렸다. 이 묘지와 기념관을 포함한 순교자 묘역은 현재 고 배문한[배정문의 증손] 신부의 생가[강서구 생곡동 272번지]에서 그의 형인 배대한이 관리하고 있다.
[상훈과 추모]
천주교 부산교구에서 순교자로 예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