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1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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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草梁倭館設門 |
영어의미역 | Questionnaires for Waegan in Choryang |
이칭/별칭 | 설문,신문(新門),새문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동구 중앙대로179번길 16[초량1동 571]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동철 |
[정의]
1709년과 1710년 두 차례 동래부 부산진의 초량촌에 설치되었던 문.
[건립 경위]
초량 왜관 북쪽 언덕 아래에는 조선인 마을인 초량촌이 있었다. 초량촌에는 초량 객사, 훈도청, 별차청, 출사청 등 조선 측 공관이 있었다. 왜관의 일본인들은 훈도와 별차에게 출입한다는 핑계로 이곳을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초량 왜관 설문은 동래 부사 권이진(權以鎭)의 주장에 따라 설립되었다. 권이진이 설문을 설치한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1707년(숙종 33)에 발생한 조선인 여인 감옥(甘玉)과 일본인 백수원칠(白水源七)과의 매매춘 문제였다. 이 사건은 부사 한배하(韓配夏) 때 발생하였지만, 권이진은 다섯 차례나 장계를 올릴 정도로 이 문제 해결에 주력하였다.
[위치]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1동 571번지 일대에 초량 왜관 설문이 있었다고 한다.
[형태]
초량 왜관 설문의 설치 시기는 1709년(숙종 35)과 1710년(숙종 36)으로 나뉜다. 『증정교린지(增正交隣志)』[권2, 관우조]에는 “숙종 35년 기축[1709]에 동래 부사 권이진이 처음 설치했다.”고 하였으나, 1740년에 편찬된 『동래부지(東萊府誌)』[초량공해조]에는 “숙종 경인년[1710]에 부사 권이진이 장청(狀請)하여 새로 창설하고, 또한 축성하여 왜인의 왕래를 금하고, 문 안의 민호(民戶)를 철거하여 문밖으로 이주시켰다. 위치는 동래부에서 26리 거리에 있다.”라고 하였다.
1832년에 편찬된 『동래부 읍지(東萊府邑誌)』[관액조], 1871년 편찬된 『동래부 읍지』[관방조]에는 “동래부의 남쪽 27리에 위치하며, 숙종 기축년[1709]에 수문 밖 3리쯤에 설치하였다.”고 하였다. 『증정교린지』에 의하면, 설문은 6칸이며, 담은 동쪽으로는 10여 보의 거리면 바다에 닿고, 서쪽으로는 수백 보의 거리면 산꼭대기에 이르고, 동래장교 1인, 통사(通事) 1인, 문직(門直) 1명이 수직(守直)하였다.
부사 권이진은 설문을 만들면서 통제책으로 다음 3가지 방법을 제시하였다. ① 훈도와 별차의 집 서쪽 담장에서 바다까지 40~50보에 불과한 지대에 작은 담을 연결해 쌓고 그 안에 문을 설치하여 군관으로 하여금 밤낮 지키게 한다. ② 훈도와 별차의 집 근처 민가를 모두 문밖 수백 보 밖으로 옮기고, 훈도와 별차의 집 앞에 통사청(通事廳)을 설치하여 통사로 하여금 돌아가면서 지키도록 한다. ③ 훈도와 별차의 집은 별도로 관사(官舍)를 만들고, 그 근처에 사람을 살지 못하게 한다.
왜관의 일본인과 왜관 밖의 조선인의 접촉이 빈번해지면서 난출(闌出), 매매춘, 밀무역 등 여러 가지 사회, 경제적 문제가 발생하고, 이것이 외교 문제로까지 확대되었다. 이에 따라 왜관에 대한 통제책이 더욱 강화되었다. 권이진은 이러한 통제책의 일환으로 왜관의 담장을 흙담에서 돌담으로 바꾸고, 왜관 밖에 설문을 설치하였다.
일제 강점기 소전성오(小田省吾)는 현지를 답사한 결과 설문은 “신초량(新草梁) 지나인정(支那人町) 571호의 중국 요리점 이흥호(怡興號) 주변에 있었으며, 영정(榮町) 6정목과 7정목의 경계를 이루는 동서의 통로에 해당하며, 산 정상에는 성벽의 흔적이 조금 남아 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 후 대곡미차랑(大曲美太郞)은 “초량정(草梁町) 571번지[중국 요리점 이흥원을 향하여 좌측]로, 그 초석이 일제 강점기까지 남아 있었다.”라고 하였다.
[현황]
일제 강점기[1920년대]에 소전성오가 현지를 답사하고, 그 지역에 살았던 노인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 것을 토대로 초량 왜관 설문의 위치가 중국 요리점 이흥호 주변인 것을 확인하였다. 1936년 간행된 『부산의 고적과 유물[釜山の古蹟及遺物]』에는, “성문의 초석이 근래까지 남아 있었다.”고 서술하고 있으나, 현재는 그 자취를 확인할 수 없다.
[의의와 평가]
초량 왜관 설문이 설치되기 전에는 왜관 담장이 왜관을 내외로 구분하는 유일한 경계였으나, 초량 왜관 설문이 설치되면서 또 하나의 경계가 설치되었다. 초량 왜관 설문은 초량 왜관의 바깥문과 같은 기능을 하였다. 1832년에 편찬된 『동래부 읍지』에서 화이(華夷)의 구분을 엄격하게 하기 위하여 설치했다고 한 것처럼, 설문은 조선인 사회와 일본인 사회를 구분 짓는 중요한 경계였다.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의 「1872 군현 지도 동래부 지도」와 19세기에 그려진 「동래부사 접왜사도」에 초량 왜관 설문 그림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