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1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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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丙子日本日記 |
영어음역 | Byeongja Ilbon Ilgi |
영어의미역 | 1636 Travelogue of Japa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엄경흠 |
[정의]
1637년 부산포를 출발하여 일본을 다녀오면서 기록한 통신 정사 임광(任絖)의 사행 일기.
[개설]
『병자 일본 일기(丙子日本日記)』는 1636년(인조 14) 병자년에 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온 임광이 부산(釜山)을 떠나 일본의 에도[江戶]까지 간 경로와 에도에서 부산까지의 귀로의 사정을 날마다 쓴 일기다. 이 일기에 따르면 사행은 1636년 10월 6일 부산을 출발하여 12월 7일에 에도에 닿았고, 12월 30일 에도를 출발하여 다음해 2월 25일 139일 만에 부산에 도착하였다.
사행 당시 정사(正使)는 임광이었고, 스스로 이 일기를 썼다. 부사(副使)는 김세렴(金世濂)이었고, 종사관(從事官)은 황호(黃㦿)였다. 이밖에 통역관으로 당상관이었던 홍희남(洪喜男), 강우성(康遇聖), 화원(畵員) 김명국(金明國) 등이 눈에 띈다. 이 일기에는 부산을 출발하고 도착할 때까지의 내용만 적혀 있을 뿐 부산에 대한 내용은 거의 없다. 며칠에 어디에서 출발하여 어디에 도착하였고 어떠한 대접을 받았는지에 대한 기록들이 대부분이며, 일본의 정치, 경제 및 기타 사정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임광은 오직 일본은 우리보다 미개한 나라이고 오랑캐의 나라라는 관념으로, 보는 것 듣는 것이 모두 같잖게 여겨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우월감과 비하 의식으로 그는 사신이란 체통만 잘 지키고 국서만 교환하면 임무를 완수한다고 여겼으며, 정치와 외교에 대한 주관이나 식견은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통역관의 배후 활약이 없었다면 외교 사절이 다녀온 의의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임광은 일본의 변화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일본의 연호를 문제 삼고 여타 의례에 문제를 제기하는 등 진전된 외교 감각이 보이지 않는다.
[저자]
임광[1579~1644]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풍천(豊川)이며, 자는 자정(子瀞),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아버지는 사헌부 감찰 임익신(任翊臣)이다. 1609년(광해군 1) 사마시에 합격한 뒤 성균관에 들어가 재사(才士)로서 이름을 떨쳤으나, 정치가 어지러움을 보고 낙향하여 공직에 나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순릉 참봉이 되었다가 이듬해 별시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풍저창 직장(豊儲倉直長)을 거쳐 승정원 주서, 성균관 전적, 호조 낭관, 병조 낭관을 지내고, 1628년(인조 6) 정언, 1632년 지평을 지냈으며, 지방 수령으로 나가 함종 현령과 영광 군수를 지냈다. 다시 중앙 관직에 돌아와 홍문관 수찬, 사헌부 장령, 필선이 되고 암행어사로 평안도 지방에 내려가 지방 행정을 바로잡았다. 균전사(均田使)가 되어 영남 지방을 돌아보고 토지 행정을 바로 잡았다.
1636년 첨지중추부사로서 통신사가 되어 일본에 다녀왔으며, 그뒤 좌승지, 한성 우윤이 되었다. 그때 남쪽 지방에 소요가 있었으므로 삼남 주사 검찰사(三南舟師檢察使)가 되어 삼도 수군을 순찰하고 돌아와 형조 참판이 되고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겸하였다. 충주 목사, 안동 부사를 거쳐 1642년 황해도 관찰사, 동지중추부사, 도승지를 지내고, 이듬해 좌부빈객(左副賓客)으로 김육(金堉)과 함께 심양(瀋陽)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 세자(昭顯世子)가 환국하게 되었을 때 이들을 수행하기 위하여 청나라에 갔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편찬/간행 경위]
저자의 필사본으로 통신사 사행원들이 남긴 일기를 1748년(영조 24) 통신사 정사인 홍계희(洪啓禧)가 수집하여 『해행총재(海行摠載)』라고 이름을 붙였고, 이후에도 유상필의 『동사록(東槎錄)』 등이 계속 수집되었다. 『해행총재』가 활자로 간행된 것은 1914~1916년에 조선고서간행회에서 영인한 『조선군서대계(朝鮮群書大系)』부터이다.
『해행총재』는 이 책의 속속(續續)편에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 『동문선(東文選)』 등과 함께 제3집에서 제6집까지 4책으로 수록되어 있는데, 민족문화추진회에서는 이를 저본으로 하여 1974~1979년에 『국역 해행총재(國譯海行摠載)』 12권을 발간하였다. 『병자 일본 일기』는 2008년에 간행된 『(신편 국역) 사행록 해행총재(使行錄海行摠載)』[전 16] 중 제5권에 실려 있다.
[구성/내용]
1636년 10월 6일 부산을 출발하여 12월 7일 에도에 도착하였으며, 12월 30일 에도를 출발하여 다음해 2월 25일 부산에 도착하는 노정이 서술되어 있다. 그가 부산에 대해 언급한 부분을 보면, 1636년 10월 6일 인시(寅時)에 부산 앞나루에서 차왜(差倭) 평성춘(平成春) 등과 함께 일시에 배를 출발시키고 초량항(草梁項)에 이르러서는 순풍에 돛을 달았다. 배가 가운데 이르자 바람 기운이 맹렬하고 흰 물결이 하늘에 닿을 듯이 높고도 요란스러웠다. 그 통에 배에 탔던 사람들이 혹은 토하고 혹은 자리에 쓰러져 뱃멀미에 시달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도착할 때의 상황을 보면, 1637년 2월 25일 느지막하게 비로소 동풍을 맞이하여 일제히 출발하였다. 바다 가운데 채 못 미쳤는데, 바람이 점점 강해지고 파도가 크게 일었다. 그래서 배 안 사람들은 거의 다 현기증으로 쓰러지고, 절영도(絶影島)[지금의 부산광역시 영도] 근처에 이르자마자 배가 올랐다 내렸다 하는 것[rolling]이 더욱 심했다. 그래서 부득이 초량항으로부터 노를 저어 갔다. 이하는 청(淸)이 침입하였다는 사연을 듣고 부산진 첨사와 동래 부사, 수사(水使) 등과 함께 통곡하였다는 내용이다.
[의의와 평가]
여타 통신 사행록에 비해 양이나 내용에 있어 가장 상세하고 문학적 가치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