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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0104
한자 金世濂
영어음역 Gim Serok
이칭/별칭 도원(道源),동명(東溟),문강(文康)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구지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선산
대표관직 호조 판서
출생 시기/일시 1593년연표보기 -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16년 - 증광시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617년 - 유배
활동 시기/일시 1623년 - 복직
활동 시기/일시 1636년연표보기 - 통신사 부사로 일본방문
활동 시기/일시 1645년 - 호조 판서에 임명
몰년 시기/일시 1646년연표보기 - 김세렴 사망
추모 시기/일시 1675년 - 시호를 받음
추모 시기/일시 1681년 - 신도비 건립
부임|활동지 동래부 관아 -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지도보기
묘소|단소 김세렴 묘 - 충청북도 충주시 앙성면 본평리
신도비 김세렴 신도비 - 충청북도 충주시 앙성면 본평리

[정의]

조선 후기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문신.

[가계]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도원(道源), 호는 동명(東溟), 시호는 문강(文康). 할아버지는 사림파의 중심인물로 우의정을 지낸 김효원(金孝元)[1542~1590]이고, 아버지는 통천 군수를 지낸 김극건(金克鍵)이다. 어머니는 홍문관 전한 허봉(許篈)[1551~1588]의 딸이다.

[활동 사항]

김세렴(金世濂)[1593~1646]은 명문가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뛰어났다. 1616년(광해군 8) 증광시 문과에 장원 급제하고 1617년(광해군 9)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 이때 인목 대비(仁穆大妃)의 폐모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비판하였다가 귀양을 갔다. 1623년 인조반정 직후 풀려나 복관되었으며, 1636년(인조 14) 통신사 부사로서 일본에 건너가 이듬해 귀국하였다. 김세렴이 지은 『해사록(海槎錄)』에 따르면, 통신사 일행은 1636년(인조 14) 9월 5일 밤 동래부에 도착하여 9월 18일 영가대(永嘉臺)에서 해신제를 지냈다. 10월 6일 일본으로 가는 배를 탔고, 이듬해 2월 25일 초량을 거쳐 부산에 도착, 이틀 뒤 한양으로 출발하였다.

김세렴 일행은 ‘통신사’라는 명칭으로 에도 막부[江戶幕府]에 파견된 첫 외교 사절이었기 때문에 준비할 것이 많고 절차도 복잡하여 한 달간 부산에 머물렀다. 그 사이 동래의 충렬사와 부산의 왜성 등 임진왜란 때의 유적을 포함해 여러 곳을 둘러보았다. 김세렴은 귀국 후 여러 관직을 거쳐 벼슬이 부제학에 이르렀다. 1641년(인조 19)에는 계모를 봉양하기 위해 자청하여 안변 부사로 나갔다. 뒤 이어 함경도 관찰사, 평안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고 1645년(인조 23) 중앙으로 복귀하여 호조 판서를 지냈다.

[학문과 저술]

김세렴은 함경도 관찰사 시절 『근사록(近思錄)』·『소학(小學)』·『성리학의(性理學義)』를 간행하였으며,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실학자이자 처조카인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을 가르쳤다. 일본 사행록인 『해사록』과 사행시를 모은 『사상록(槎上錄)』을 남겼는데, 통신사라는 명칭으로 에도 막부에 파견된 최초의 사절이었으므로, 통신사 절목 조율을 위해 다른 사행 때보다 오랜 기간 부산에 머물러 부산을 관찰한 기록도 풍부한 편이다. 문집으로 『동명집(東溟集)』이 있다.

[묘소]

김세렴의 묘는 충청북도 충주시 앙성면 본평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1675년(숙종 1) 문강(文康) 시호를 받았고, 1681년(숙종 7) 충청북도 충주시 앙성면 본평리에 신도비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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