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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0023
한자 梁壽根
영어음역 Yang Sugeun
분야 종교/불교,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인물/종교인
지역 부산광역시 금정구 범어사로 250[청룡동 546]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정미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종교인
성별
대표경력 범어사 주지
출생 시기/일시 1898년 6월 27일연표보기 -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 범어사 3·1 운동 주동
활동 시기/일시 1919년 - 대구감옥소 수감
몰년 시기/일시 1977년 2월 26일연표보기 -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70년 - 범어사 3·1운동 유공비 건립[1970]
추모 시기/일시 1995년 - 범어사 3·1운동 유공비 건립[1995]
추모 시기/일시 1997년연표보기 - 대통령 표창 추서
출생지 부산광역시 금정구 노포동
학교|수학지 명정학교 -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546지도보기
학교|수학지 지방학림 -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546지도보기
활동지 대구감옥소 - 대구광역시
활동지 범어사 - 부산광역시 금정구 범어사로 250[청룡동 546]지도보기

[정의]

1919년에 부산 범어사 3·1 운동을 주동한 승려이자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양수근(梁壽根)[1898~1977]은 1898년 6월 27일 부산광역시 금정구 노포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범어사에 입산하여 범어사명정학교[현 청룡초등학교]와 범어사 지방학림에서 수학하였다. 1919년 서울의 3·1 운동에 참여했던 김법린(金法麟)·김상헌(金祥憲) 등이 범어사로 돌아오자 범어사에서도 중견 청년 승려 김봉한·김영규(金永奎)·차상명(車相明)과 지방학림 학생 김상기(金相琦)·허영호(許永鎬), 명정학교 학생 김한기(金漢琦) 등이 지방학림과 명정학교 학생들을 규합하여 3월 18일 동래 장터에서 장날을 기하여 의거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지방학림의 학생이었던 양수근은 인원 동원과 선동의 임무를 맡았다.

1919년 3월 18일 새벽 시위 주모자들은 동래구 복천동에 있는 범어사 동래포교당으로 모였으나, 명정학교 학생 오계훈의 발고로 시위 전에 일본 헌병과 경찰의 습격을 받았다. 이로 인해 김영규·차상명·김상기·김한기 등은 강제 연행되고 나머지는 해산 당하였다. 그러나 양수근 등 검거를 피한 주모자들은 3월 18일 밤 40여 명의 명정학교 및 지방학림의 학생들과 함께 만세 시위를 단행하였다. 이들은 동래읍 서문 근방에서부터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동래 시장을 거쳐 동래읍 남문까지 행진하였다. 3월 19일에도 동래 시장 일대에서 독립 사상을 고취하는 격문을 뿌리고 만세 시위를 계속하였다. 이때 양수근은 다른 시위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부산감옥소에 투옥되었다.

부산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월을 선고 받자 다시 대구복심법원에 상소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도 원심과 마찬가지로 징역 6월을 선고 받고 대구감옥소에서 복역하였다. 출옥 후 양수근은 지방학림을 졸업하고 서울의 중앙불교전문학교[현 동국대학교]에 진학하였다. 그 후 범어사에서 수도하였으며, 1940년대 말 범어사 주지를 지냈다. 1977년 2월 26일 세상을 떠났다.

[상훈과 추모]

1970년 금정중학교 교정에 세운 ‘범어사 3·1운동 유공비’와 1995년 금정구 구서1동 동래여자고등학교 앞에 세운 ‘범어사 3·1운동 유공비’에 이름이 새겨졌다. 1997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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