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022 |
---|---|
한자 | 裵石伊 |
영어음역 | Bae Seoki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부산광역시 금정구 범어사로 250[청룡동 546]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미숙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배석이(裵石伊)[1898~?]는 1898년 1월에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에서 출생하였다. 범어사(梵魚寺)에 인접한 마을에서 태어난 배석이는 범어사에서 설립한 명정학교에 입학하였다. 1919년 2월 하순에 한용운(韓龍雲)이 3·1 운동을 앞두고 범어사를 찾아와 오성월(吳惺月), 이담해(李湛海), 오이산(吳梨山)을 만나 3·1 운동에 참여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에 범어사 명정학교와 지방학림의 재학생 및 졸업생 7명이 서울로 가서 3·1 운동에 참가하고 독립 선언서를 가지고 돌아와 범어사 3·1 운동을 계획하기 시작하였다.
애초 이들은 동래 장날인 3월 18일에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하였다. 그러나 명정학교 학생 오계운(吳啓運)이 이러한 사실을 누설하였기 때문에, 18일 새벽 복천동의 범어사 동래포교당에서 주동자 상당수가 체포되었다. 하지만 검거를 피한 명정학교와 범어사 지방학림 학생 40여 명은 18일 밤 동래읍 서문 근방에서부터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동래 시장을 거쳐 남문까지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들은 19일에도 동래 시장 일대에서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격문을 뿌리고 만세 시위를 계속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곧 일제의 의해 검거되었다.
배석이는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지만 체포되지 않았다. 그 후 김상헌, 김상호를 따라 통도사(通度寺) 등을 다니며 상해 임시 정부에 헌납할 자금의 모금에 협력하였다. 이러한 행적 때문에 항상 일제 경찰의 감시 속에서 이곳저곳 유랑 생활을 해야 하였으며 광복이 되고서야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상훈과 추모]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헌신한 공을 인정받아 1962년 8월 15일 문화포장을 받았다. 또한 1970년 부산광역시 금정구 남산동 금정중학교 교정에 세운 범어사 3·1 운동 유공비와 1995년 구서1동 동래여자고등학교 앞에 세운 범어사 3·1 운동 유공비에 배석이의 이름이 나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