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93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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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海州吳氏 |
영어의미역 | Haeju Ohsi|Haeju Oh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부산광역시 |
집필자 | 김연지 |
[정의]
오현보를 시조로 하고, 오경선을 입향조로 하는 부산 지역의 세거 성씨.
[개설]
오씨(吳氏)의 본관은 문헌에 210본으로 전하고 있으나 해주·동복·보성·고창·홍양·나주·함평·울산·낙안·평해·군위·장흥·함양·화순·전주·연일 등을 제외한 나머지는 16본 오씨들의 세거지에 지나지 않는다.
『오씨 대동보』에 의하면 우리나라 오씨의 도시조(都始祖)는 오첨(吳瞻)이라 한다. 그는 신라 제22대 지증왕(智證王) 원년 중국에서 건너왔다가 국명을 받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으나 오첨의 둘째 아들 오응(吳膺)은 그대로 남아 함양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 뒤 응의 12세손 오광우(吳光佑)가 또 중국으로 들어갔으나 그의 현손 오연총(吳延寵)이 고려 문종 때 다시 우리나라에 건너와 정착했다고 한다. 따라서 오연총이 전국 오씨의 중시조가 된다.
오연총의 5대손 오수권(吳守權)의 세 아들 오현보(吳賢輔)·오현좌(吳賢佐)·오현필(吳賢弼)이 고려 고종 때 우리나라에 침입해 온 거란군을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워 각각 해주군(海州君)·동복군(同福君)·보성군(寶城君)에 봉해져 해주·동복·보성 오씨의 시조가 되었다. 현존하는 모든 오씨는 이 세 오씨로부터 분적한 동일 혈손이다.
[연원]
해주 오씨의 시조 오현보는 모든 오씨의 도시조인 오첨의 24세손이며, 중시조인 문양공(文襄公) 오연총의 6세손이다. 오현보는 1216년(고종 3년) 두 아우 오현좌·오현필과 함께 거란군 토벌에 공을 세워 해주군에 봉해지고 해주 오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러나 해주 오씨는 고려조에 검교 군기소감(檢校軍器少監)을 지낸 오종인(吳宗寅)을 1세조로 하는 파와 역시 고려조에 검교 군기감사(檢校軍器監事)를 지낸 오인유(吳仁裕)를 1세조로 하는 두 파로 나뉜다.
[입향 경위]
부산의 해주 오씨는 기장현 하서면 연구동(蓮龜洞)[기장군 철마면 와여리] 문중에서 시작된다. 오홍(吳鴻)과 오춘수(吳春壽)[1573~1595]의 5대 조부인 오계종(吳戒從)[?~1501, 무과 급제]이 1490년(성종 21) 7월 30일에 기장 현감으로 부임하면서, 그 자손들이 기장 땅과 인연을 맺게 된다. 1937년에 편찬된 『동래군지』 「성씨」조에 의하면, 훈련원 판관 오필경(吳弼卿)[?~1525]의 아들인 오경선(吳慶先)이 서울[京: 한양]에서 기장현의 연구동에 터를 잡아 입향하여 입향조(入鄕祖)가 되었는데, 별전공신인 오홍과 오춘수의 증조부가 된다. 오홍과 오춘수는 재종형제(再從兄弟)[6촌]간으로 임진왜란에 세운 공적으로 오씨 집안의 현조(顯祖)로 자리매김하였으며, 그 후손들은 기장군 철마면 와여리에 세거하며 한 문중을 이루어 살고 있다.
[현황]
1937년 문기주(文錡周)가 편찬한 『동래군지』의 성씨조에는 해주 오씨가 세거(世居) 성씨로 기록되어 있다. 2000년 인구 조사에서 해주 오씨는 9,879가구에 3만 1785[남자 1만 5873명, 여자 1만 5912명]이 부산 지역에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해주 오씨는 사상구 주례동과 기장군 철마면 와여리에서 세거하고 있다.
[관련 유적]
오홍과 오춘수가 임진왜란 때의 공적[별전 24공신]으로 부산광역시 동래구 안락동에 있는 충렬사에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또 오홍과 오춘수 등을 모신 사당이 구산단(龜山壇)·의용당(義勇堂)이다. 기장군 철마면 구칠리 점현 마을에 해주 오씨 삼정재(三亭齋)라는 재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