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주례동 해주 오씨 세거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7446
한자 周禮洞海州吳氏世居地
영어의미역 Jurye-dong haeju O Clan Hometown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부산광역시 사상구 주례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영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세거지
세거지 주례동 해주 오씨 세거지 - 부산광역시 사상구 주례동

[정의]

부산광역시 사상구 주례동에 있는 해주 오씨 세거지.

[명칭 유래]

주례(周禮)의 지명은 공동으로 농사를 짓던 두레를 한자로 옮기면서 생겨났다고 한다. 또 주례의 지형이 동평현에서 서쪽으로 돌아 나오는 곳이기 때문에, ‘두루’라는 어원과 낙동강변의 변두리로 ‘두리’라는 말의 토속어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형성 및 변천]

사상구 주례동에 살고 있는 해주 오씨(海州吳氏)는 오태중(吳泰重)의 후손인 오환묵(吳讙默)[또는 오환연(吳讙然)]과 오희선(吳羲善)[1858~?] 부자가 경상북도 선산(善山)에서 주례동으로 1890년경에 이주해 온 뒤, 오희선의 문과 급제로 지역의 대표적 가문으로 등장하였다.

오씨들이 주례동에 거주한 내력은 『동래군지(東萊郡誌)』[1937]에 오태중(吳泰重)과 오전영(吳典泳), 오기영(吳琪泳)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오태중은 임진왜란 공신 완월당(玩月堂) 오응정(吳應鼎)[1548~1597]의 후예이고, 오전영은 오응정의 후손으로 장령 오희선의 아들이다. 오기영은 오환묵의 손자로 기록되어 있다.

해주 오씨 주례동 문중의 중심인물은 오희선과 오택(吳澤)[1897~1948]이다. 오희선은 조선 시대 동래 지역에서 배출된 문과 급제자 7명 가운데 한 사람이다. 『고종실록(高宗實錄)』에 의하면, 오희선은 1889년 직부전시(直赴殿試)[예비 시험을 거치지 않고 전시에 곧장 응시함]의 명을 받고 문과에 급제하여 주서(注書), 1891년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1892년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의 벼슬을 거치며 중앙 관직에 나간 이 지방의 대표적 문관으로 이름이 났다.

독립운동가인 오택은 오희선의 종질(從姪)이다. 오택은 1905년 최익현(崔益鉉)의 운구(運柩)가 쓰시마 섬[對馬島]에서 주례를 거쳐 구포로 갈 때 만장(輓章)을 들고 따랐으며, 1907년 국채 보상 운동 당시에는 맨발로 통학하며 짚신 대금을 모아 헌납하였고, 1915년 부산상업학교 재학 중에는 박재혁(朴載赫)·박홍규·김인태 등과 구세단(救世團)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그리고 1919년 3·1 만세 운동에 참가하였으며, 1920년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폭탄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또 1921년 만주일보 경남지국을 인수하여 신문업에 종사하다가 구속되어 대구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22년 의열단 김상옥(金相玉) 사건에 관련되어 고초를 겪었고, 1928년 신간회 부산지회의 간사로 활동하며 일제의 감시를 받아 왔다. 그 후 항일 정신을 바탕으로 여러 사회 운동을 하다가 1948년 사망하였다. 1983년 생전의 공로를 인정받아 건국 훈장이 추서되었다.

[자연 환경]

주례동은 북동쪽으로 백양산, 남동쪽으로 엄광산, 동쪽으로 남북의 두 개 산지가 마주하는 고개가 있다. 서쪽으로 낙동강변으로 열려 있는 평지와 하천 변의 저습지가 발달해 있다.

[현황]

오씨는 1601~1910년 작성된 「동계(洞契)」에 5명이 기록되어 있고, 1904년 편찬된 『경상남도 동래군 가호안(慶尙南道東萊郡家戶案)』에 4가구가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또 『동래군지』 성씨조에 3명이 우거(寓居)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2013년 현재 해주 오씨 문중은 도시화로 인하여 사상구 주례동에 몇 가구만 거주하고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