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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홍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1400
한자 吳鴻
영어음역 O Hong
이칭/별칭 치화(致化),연파(蓮坡)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연구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공태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의병
성별
대표경력 예빈시 참봉
출생 시기/일시 1566년연표보기 - 출생
활동시기/일시 1589년 - 예빈시 참봉으로 재임
활동 시기/일시 1592년 4월 20일 - 기장읍성 수복
활동 시기/일시 1592년 - 조평에서 전과를 올림
활동 시기/일시 1596년 - 운봉 전투 참가
활동 시기/일시 1597년 1월 24일 - 남원성 전투 참가
몰년 시기/일시 1597년 1월 24일연표보기 - 사망
추모 시기/일시 1608년 - 24별전공신이 됨
추모 시기/일시 1709년 - ‘의용’이라고 써진 편액을 받음
추모 시기/일시 1760년 - 장례원 사평으로 추증
추모 시기/일시 1769년 - 통훈대부 장악원 정으로 추증
추모 시기/일시 1919년 3월 - 구산당·의용당에 배향
출생지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연구리
활동지 기장읍성 -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 320 일원지도보기
활동지 조평 - 경상남도 양산시 평산동 일원
활동지 대운산 - 울산광역시 울주군 온양읍 운화리 일원
활동지 남원성 - 전라북도 남원시 동충동 464-1
관련 유적 충렬사 - 부산광역시 동래구 안락동 838지도보기
관련 유적 구산당·의용당 -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와여리 317-4

[정의]

조선 후기 부산 출신의 의병.

[가계]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치화(致化), 호는 연파(蓮坡). 해주 오씨 판관공파(判官公派)의 파조인 오필경(吳弼卿)의 고손자이다. 같이 의병 활동을 한 오춘수(吳春壽)는 육촌 동생이다.

[활동 사항]

오홍(吳鴻)[1566~1597]은 1566년(명종 21)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연구리에서 태어났다. 23살의 나이에 장사랑(將士郞) 예빈시(禮賓寺) 참봉(參奉)에 제수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동래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6촌 아우로부터 전해 듣고 의병을 모집하였다. 사방에서 모여든 의병이 300여 명이 넘었다. 이들을 직접 훈련시켜 기장읍성 탈환 작전을 수행하였다. 특히 1592년 4월 20일, 6촌 아우인 오춘수와 함께 기장현의 관문인 현 기장군 기장읍 서부리 용소 계곡에 매복하여 적병을 탐지하고 그날 밤 의병들과 동민들에게 한 사람 당 여러 개의 횃불을 들게 하여 동서부와 대라리를 점령하고 있던 왜군을 기습 공격하였다. 왜군들은 밤중에 수천 개의 횃불을 들고 함성을 지르는 위장 전술에 놀라 겁을 먹고 제대로 도망도 못 가고 골짜기에서 의병들에게 대패를 당하였다. 이때 왜군의 전사자가 470명이었다. 이것이 임진왜란 기장 전투의 첫 전과였다.

오홍기장읍성을 탈환한 뒤 군사 훈련과 의병 모집을 계속하였다. 두모포[기장군 기장읍 죽성리] 해안 등지에 있던 왜군들이 남산[기장군 기장읍 신천리] 기슭에서 의병들을 포위하였다는 보고를 받고 오춘수, 휘하 의병들과 함께 이언홍(李諺弘)과 김흘이 이끄는 의병대와 합세하여 포위된 의병들을 구출하였다. 구출된 의병들은 임진왜란 후 선무 원종공신 일등에 봉해진 김일개(金一介)와 휘하의 의병들이었다. 이것이 두모포의 전과이다.

또한 김일덕(金一德) 의병장에게 기장현의 대리 현감직을 맡아서 기장현의 방어를 맡아달라고 부탁하고 300여 의병들을 데리고 동래의 소산역으로 향하였다. 당시 좌병사 이각(李珏)과 밀양 부사 박진(朴晋)소산역을 버리고 언양성으로 후퇴하여 좌수사 박홍(朴泓)과 같이 있다가 언양성에서도 이각이 달아나자 모두 울산 본진이 되는 병영으로 후퇴하였고 이어 경주까지 달아났다. 그래서 오홍은 인근에 있던 의병 부대와 연합하여 조평(鳥平)에 있는 적군을 장방 골짜기로 유인하는 한편 그 일부는 매곡 골짜기로 유인하였다. 때마침 회야강이 홍수로 범람하고 있었으므로 덕계천에 허술한 다리를 가설하고 이 위장된 다리 쪽으로 적을 유인하여 협공하였다. 적은 이 전술에 휘말려 100여 명의 시체를 남기고 달아났다. 오홍은 달아나는 적들을 쫓아 어둠을 틈타 소탕하였다. 그러면서 당촌산(堂村山) 옆에 본진을 두고 적을 무찔렀다. 이 전투에서 적 700여 명을 죽였다. 이것이 조평의 전과이다.

오홍은 대운산 동쪽 큰 골짜기에다 본거지를 정하고 의병들을 모아 훈련시켰다. 대운산은 기장현의 접경 지역인 화철령을 끼고 있어서 기장 고을과 근접한 곳이자 산이 높고 계곡이 깊은데다가 산 중허리는 모두 급경사를 이루고 있어 함부로 기습할 수 없는 천혜의 요충지였다. 오홍은 울산 병영에서도 왜군의 군량미를 노획하고 소각 전과를 거두는 등 곳곳에서 의병들과 합세하여 전승을 얻었다. 임진왜란 발발 3년째에 접어들어 민심이 어느 정도 안정되고 풍년이 들자 대운산 산채에 들어가 의병들을 훈련시키며 앞으로의 일에 대비하였다.

1596년(선조 29) 당시 순천 부사로 있던 오응승(吳應昇)에게 가담하여, 오동량(吳東亮)과 연합해 운봉(雲鳳) 전투에서 큰 전과를 거두었다. 다음해 정유재란[1597년]이 일어나자 오응승 3부자와 함께 남원성에서 혈전을 계속하였다. 그러던 중 정월 23일 밤, 수하의 의병 100여 명을 이끌고 남원성 밖에 있는 적병을 기습하였는데 수적으로 열세였을 뿐만 아니라 또 다른 복병을 만나 결국 수하에 있던 10여 명의 의병들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당시 나이는 32세였다. 기록에는 1597년(선조 30) 1월 24일 인시(寅時)였다고 한다. 시신은 고향으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1608년(선조 41) 동래 부사 이안눌(李安訥)의 계청(啓請)으로 24별전공신(別展功臣)으로 추증되어 동래 안락서원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었다. 1709년(숙종 35) 승지(承旨) 권대재(權大載)와 부사 어진익(魚震翼)등의 상주로 ‘의용(義勇)’이란 편문액(扁門額)을 하사받았다. 1760년(영조 36) 관찰사 민응수(閔應洙)의 상주로 정6품에 해당하는 장례원 사평(掌隷院司評)에 추증되었다가, 1769년(영조 45)에 다시 관찰사 김한기(金漢耆)의 상주로 통훈대부 장악원 정(掌樂院正)[정3품]에 추증되었다. 1919년 3월에 기장에 있는 구산당·의용당에 배향되었고, 매년 음력 3월 초정일에 향사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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