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37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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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龜浦橋 |
영어의미역 | Gupo Bridge |
이칭/별칭 | 구포 다리,낙동장교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도로와 교량 |
지역 |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강서구 대저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주경업,황남진 |
[정의]
1933년 건립된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과 강서구 대저동을 연결하던 다리.
[개설]
옛 구포교에서 구포역에 이르는 지역의 번지는 도로명 주소로 변경되기 이전 1060-1, 1060-2 등을 사용하였다. 지번으로 사용된 1060은 구포교의 길이[m]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명칭 유래]
구포에서 낙동강을 건너는 다리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건립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다리라고 하여 낙동장교(洛東長橋)로 이름이 붙었고, 주민들은 구포 다리로 불렀다.
[제원]
구포교는 길이 1,060m에 너비 9.8m, 높이는 15.2m인 왕복 2차선로였다. 상판은 게르버교로 판형교이며, 교각은 56개였다. 공사 당시 총 7,760명이 동원되었고, 공사비는 70만원[정부 보조 40만원, 지방비 19만원, 지방 지원 부담 11만원]이 소요되었다.
[건립 경위]
구포교가 건립되기 이전까지 구포와 대저 간에는 수운을 이용해 이동이 가능하였다. 다리의 개통으로 경상남도 서부와 부산을 연결하는 한편, 경부선 철도역인 구포역으로의 접근성을 향상시켰다. 특히 김해는 장마가 계속되는 우기에는 교통이 두절되어 서부 경상남도를 직결하는 간선 도로가 마비되고 김해 지역민들은 물바다 속에 고립되었기에 다리 공사에 적극적이었다. 반면 구포 지역민은 소극적이었는데, 이에 김해 군수 황덕순(黃德純)은 구포 다리가 가설되기까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구포교는 1930년 9월 13일 공사를 시작해 1932년 3월 7일 완공되었다. 공사비만 70만 원이 드는 대공사였다. 건설 당시에는 국내는 물론 아시아에서도 가장 긴 교량으로 유명하였다.
[변천]
낙동강의 유일한 교량으로 부산과 경남을 연결하였던 구포교는 1997년 12월 하류 쪽으로 200m 떨어진 곳에 최첨단 공법으로 시공한 구포 대교가 준공되면서 승용차 전용 교량으로 이용되었다. 2003년 9월 13일 태풍 매미가 한반도를 강타할 때 상류 지역의 폭우로 불어난 강물로 인해 구포교의 무쇠 다릿발이 뽑혀나가며, 19번 교각이 붕괴되고 길이 15m의 상판 4개가 연달아 떨어져 나가 60m 구간이 붕괴되었다. 구포교의 붕괴로 더 이상의 사용은 불가능해졌으며, 당시 철거해야 한다는 의견과 역사 유적으로 보존해야 한다는 의견이 모두 제기되어 정밀 안전 진단 끝에 2004년 7월 E급 재난 위험 시설로 지정되었다.
2005년 7월에는 다대항 배후 도로 2단계 공사를 위해 구포 쪽 125m 구간을 철거하고, 동년 9월에는 홍수로 인해 21번 교각이 부서지며 상판이 붕괴되어 매미 때 붕괴된 구간 옆으로 20m 구간이 더 붕괴되었다. 홍수로 인한 붕괴와 다대항 배후 도로 건설로 인한 철거로 두 군데가 떨어져 나간 구포교는 2008년 1월부터 철거를 시작하여 12월 다리 교각(橋脚)과 상판이 완전히 철거되었다.
[현황]
구포교는 명칭만을 남긴 채 철거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