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32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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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戡蠻浦 |
영어음역 | Gaman-po |
이칭/별칭 | 감만이포,가마이,가마니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고지명 |
지역 | 부산광역시 남구 감만동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성환 |
[정의]
일제 강점기에 매립된 부산광역시 남구 감만동에 있던 해안 포구.
[명칭 유래]
감만포(戡蠻浦)는 남구 감만동의 이름에서 유래하였으며, 감만이포로도 불렸다. 감만은 ‘무찔러 이긴다’는 감(戡)과 ‘오랑캐’를 의미하는 만(蠻)이 합쳐져 만들어진 이름이다. 『동래부지(東萊府誌)』[1740]에 감만이(戡蠻夷)로 기록되어 전하는데, 가마이·가마니로도 불렀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는 오랑캐를 무찌른다는 의미 때문에 적기(赤崎)로 불려졌다. 또한 적기는 주변에 흙이 붉어 붙여진 이름으로 전한다.
[형성 및 변천]
감만포는 1635년(인조 13)부터 1652년(효종 3)까지 경상 좌도 수군절도사영이 있던 중요한 군사 요충지이다. 일제 강점기 감만포를 대륙 전진 병참 기지인 부산항의 보조항으로 개발하기 위해 1919년부터 1927년까지 감만동 아래깻문 도로변부터 감만동 버스 종점 부근까지 바다를 매립하였고, 1934년 4월부터 1937년 말에 걸쳐 일본인 이케다가 남구 우암동 약 49만 5867.77㎡[15만 평]를 매립하여 물양장(物揚場)[접안 시설]·선유장 및 시가지를 조성하였다. 또한 추가로 1940년 감만동 약 2만 6446.28㎡[8,000여 평]의 공장 부지, 1944년 약 8만 5950.41㎡[2만 6000평]의 부지를 매립하였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 감만포 일대는 적기로 불렸는데, 당시 이 지역에는 아카츠키 부대로 불리는 일본 육군 선박 수송 부대가 주둔하였으며, 원활한 전쟁 수행을 위해 동양척식주식회사에 의해 임항 철도 건설 사업 및 항만 시설 확충 사업이 계속 추진되었다.
광복 후 1950년 부산진역과 적기를 잇는 철도의 우암선이 개통되고 우암역이 준공되었으며, 또한 적기 매립지에 6·25 전쟁 피난민 7만 명을 수용하였다고 한다. 현재 우암로는 일제에 의해 매립되기 전 바닷가를 매립하여 만든 도로이며, 철도는 컨테이너 수송을 위해 감만 부두까지 연장되어 운영되며 신선대역이 준공되었다. 부두는 항만 현대화 사업 계획에 의해 확장되어 현대식 시설을 갖춘 7 부두, 우암 부두, 8 부두, 연합 부두가 운영되고 있다.
[위치 비정/행정 구역상의 구분]
감만포는 매립으로 옛 모습이 거의 사라졌으며, 현재의 남구 우암동과 감만동 해안 지역 일대로 추정한다.
[관련 기록]
『해행총재(海行摠載)』에 감만포 또는 감만이로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