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29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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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傳統時代-建築 |
영어의미역 | Architecture in Traditional Era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선사/선사,고대/고대,조선/조선,근대/근대 |
집필자 | 김현라 |
[정의]
전통 시대 부산의 건축.
[개설]
선사 시대, 삼한 시대, 삼국 시대, 통일 신라 시대, 조선 시대의 부산에 남아 있는 주거지와 범어사, 동래 읍성, 초량 왜관 등의 건축 과정 및 형태 등을 통해 전통 시대 부산의 건축에 대해 알아본다.
[주거지]
1. 선사 시대의 주거지
부산은 서울이나 평양, 경주와 같은 오래된 도시는 아니지만 자연 지형상 일찍부터 사람이 살아왔다. 선사 시대의 수렵 어로 생활에 적합한 바다, 강, 산지를 끼고 있기 때문이다. 부산 지역에 사람이 살았던 흔적으로 조개더미를 들 수 있다. 부산 동삼동 패총, 조도 조개더미, 영선동 조개더미, 금곡동 율리 조개더미, 다대동 조개더미, 범방 가동 조개더미 등지에서 원시 건축의 하나인 수혈 주거지(竪穴住居地)의 전형적인 형태가 발견되지는 않았다.
다만 부산 동삼동 패총과 금곡동 율리 조개더미에서 노지(爐址)[화덕 자리]와 살림집 축조에 이용한 것으로 보이는 적석(積石) 시설이 발견되었고, 부산 동래 패총에서는 원형 주거지·옹관(甕棺)·야철지(冶鐵址), 범방 가동 조개더미에서는 원형 노지와 집석 유구(集石遺構), 인골이 각각 발견되었다. 이것들은 살림집을 짓고 산 흔적이다. 이를 통해서 부산에서는 대략 5,000~6,000년 전에 취락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청동기 시대의 주거에는 지상에 큰 기둥을 세워서 그 위에 지은 굴립주 건물(掘立柱建物)도 있지만, 부산 지역에서 확인되는 것은 거의 대부분 땅을 파서 만든 수혈 주거지이다. 1985년과 1986년, 1988년에 조사된 금정구 노포동 유적과 반여동 유적에서 2기씩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최근에 발굴 조사된 사례로는 기장 지역의 가동 유적, 방곡리 유적, 청강리 유적이 있다. 예컨대 온천동 유적의 청동기 시대 주거지는 모두 4동이 확인되었다. 주거지의 평면 형태는 장방형과 방형으로 구분되며, 벽구(壁溝)·노지·배수구 시설이 확인되었다.
2. 삼한 시대의 주거지
부산에서 확인된 삼한 시대의 집 자리는 동래구 내성 유적과 기장군 정관읍 가동 유적이 있다. 동래구 복천동 내성 유적에서는 기원전 2∼기원전 1세기에 해당하는 집 자리 2동이 확인되었는데, 대부분 파괴되고 모서리 부분만 일부 남아 있었다. 전체적인 형태는 방형이나 장방형으로 추정되며, 2호 집 자리에서는 북벽 가까이에 화덕 터가 있었다.
가동 유적은 3세기부터 6세기에 걸친 마을 유적인데, 그중 삼한 시대의 집 자리는 5동 내외이다. 집 자리의 형태는 방형에 가까우며 길이는 4∼7m이다. 구덩이를 파고 벽 쪽에는 배수를 위한 도랑을 돌렸고, 도랑의 안쪽에는 기둥을 촘촘히 박고 점토를 발라 벽체를 구성하였다. 집 자리 내부의 한쪽 벽체에는 ‘ㄱ’자 모양의 부뚜막과 고래를 설치하였다. 부뚜막과 고래는 점토에 짚을 섞어 만들었고, 부뚜막의 가운데에는 돌을 세워 받침으로 사용하였다. 집 자리 주변에는 고상 가옥(高床家屋)의 흔적인 기둥 구멍이 다수 확인되었는데, 창고 시설로 추정된다. 고상 가옥의 흔적은 가야의 가형(家形) 토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또 『삼국지(三國志)』 변진전(弁辰傳)에서도 고상식 건축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는 고온 다습한 해양성 기후에 대응하기 위한 건축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3. 삼국 시대의 주거지
삼국 시대의 대표적 유적은 강서구 지사동 유적, 기장 가동 유적과 청강리 유적 및 대라리 유적 등이다. 지사동 유적의 주거지군은 능선 끝 충적대에 위치하며, 50여 기 이상으로 이루어졌다. 주거지의 평면 형태는 말각 방형·장방형·원형 등 다양하고, 대부분의 주거지 내부에 소토가 채워져 있었다.
가동 유적의 수혈 주거지는 평면 형태가 장방형·방형·타원형·원형·부정형 등 다양한데, 그중 방형이 다수를 차지한다. 주거지는 반지상식 가옥으로 규모나 면적, 깊이 등은 편차가 있다. 주거지 바닥은 대부분 적갈색 사질토 또는 점토를 깔아 다졌거나 불다짐을 하였다. 벽은 수혈에서 안쪽으로 약간 들어가 흙을 채워 넣은 다음 판재나 각목 등의 목재로 뼈대를 만들고, 뼈대 안쪽 면에 점토를 덧발랐다.
주거지 벽을 따라 도랑을 파 벽구를 만들고, 그 안에 작은 기둥 구멍을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하였다. 서쪽 벽에 치우쳐서 점토로 아궁이를 설치하였고, 북쪽 벽을 따라 구들이 설치되었다. 부뚜막은 불을 피우는 아궁이와 솥 걸이를 비롯하여 길쭉한 돌 1장을 세워 솥 받침으로 사용하였다. 솥 받침을 사용한 이유는 부뚜막이 솥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궁이 바닥에 돌을 놓고 그 위에 솥 바닥을 닿게 하였다. 아궁이에서 ㄱ자식으로 꺾여 구들을 연결하였는데, 이는 연기의 역류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굴립주 건물 터는 4주·6주·9주 등과 규모가 아주 큰 것 등 다양하다. 굴립주 건물 중 일부에서 상태가 양호한 목재 기둥 하부가 출토되었는데, 기둥 아래에 돌 또는 목재를 받친 예도 확인되었다.
4. 통일 신라 시대의 주거지
통일 신라 시대의 건물 및 주거지의 일면은 해운대구 송정동 유적과 기장군 동부리 유적에서 알 수 있다. 송정동 유적은 건물 터·수혈 유구·우물·석렬(石列)·하천 등이 발견되었다. 8세기경의 건물로 추정되는 곳은 심하게 파괴되어 구체적인 구조와 형식을 알 수 없지만, 바닥에 많은 기와 조각이 깔려 있어 기와지붕을 한 건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기와는 연화문 수막새, 암키와, 토수 기와 등이 출토되었다. 연화문 수막새는 주연에 연주문(連珠文)을 배치하고, 꽃잎은 이중으로 배치하였다.
또 수혈 주거지는 방형이고 동쪽으로 치우쳐 노지가 있다. 기둥 구멍 등은 확인되지 않아 어떤 구조의 지붕이었는지 확인할 수 없다. 통일 신라 시대의 일반 주거지의 경우, 대부분 부뚜막과 구들이 설치되었으나 이 주거지는 바닥에 노지가 있는 점을 볼 때 임시 주거 또는 특수 목적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주거지 내부에서 토기와 평기와 조각이 출토되었다. 수혈 주거지 옆에 석조 우물 1기가 있다. 생활 유구와 출토 유물 등을 고려하면, 8세기 전반부터 이곳 일대에 기와 건물과 우물 및 수혈 주거지로 이루어진 마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기장 동부리에서 조사된 건물 터는 자갈을 채운 원형의 적심석(積心石)과 적심석으로부터 북쪽으로 떨어진 곳에 2단의 석축 시설이 있다. 남아 있는 적심을 통하여 볼 때, 정면과 측면이 3칸 정도인 남향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석축 시설은 동쪽에서 남쪽으로 ‘ㄱ자’식으로 꺾이는데, 많이 남아 있는 곳은 3단 정도이다. 건물은 기와지붕을 한 앞쪽에 2중으로 된 기단이 있는 가옥으로 추정된다.
5. 조선 시대의 주거지
고려 시대의 주거지를 볼 수 있는 유적이나 문헌은 아직 없다. 조선 시대의 주거 형태는 대부분 초가이다. 1904년에 작성된 『경상남도 동래군 가호안(慶尙南道東萊郡家戶案)』에 동래군 8개면[읍내면·서하면·사상면·사중면·동평면·남하면·남상면·동상면] 4,779호 가운데 와가는 89호[1.9%] 정도이고, 1908년에 작성된 신식 호적인 『동하면 호적(東下面戶籍)』에 총 392호가 등재되어 있는데 모두 초가이다.
가옥의 규모 면에서 보면 『동하면 호적』 388호는 최소 1칸에서부터 최대 8칸까지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 중 2~3칸 가옥이 60.6%, 4~5칸 가옥이 24.2%이다. 이에 비해 6칸·7칸·8칸 가옥은 각각 35호[9.0%], 22호[5.6%], 1호[0.3%]에 불과하다. 이처럼 동하면 가옥의 84.8%는 2~5칸의 규모를 보이는데, 이 중에서도 2~3칸의 규모가 다수를 차지한다. 1호당 평균 가옥 칸수는 3.62칸, 인구 1인당 평균 가옥 칸수는 0.80칸으로 각각 나타낸다. 이는 1904년 당시 경상남도 전체의 호당 평균 가옥 칸수인 2.75칸보다는 크지만 개성부 북부 이정리, 인천 답동 등에는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
[불교 건축-범어사]
왜구 침입에 대비하기 위하여 지은 사찰인 범어사의 초창 기록을 담고 있는 「범어사 창건 사적기(梵魚寺創建事蹟記)」에는 “지관(地官) 의상(義湘), 감조(監造) 흥덕왕, 번와 감역(燔瓦監役) 평장사 유춘우, 자재 운반 묵운귀”라고 기록되어 있다. 의상과 흥덕왕의 생존 시기가 맞지 않아 기록의 신빙성에 문제가 있지만 국왕과 국사, 고급 관리들이 범어사 조성에 나섰다는 점을 보여 주는 자료이며, 또한 이를 통해 범어사 조성이 국가적 사업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주불전인 범어사 미륵전은 중층으로 짓고, 비로전·대장전·강전 같은 불전 및 법당 등은 대부분 3칸 규모, 남협당(南俠堂)이나 그 밖의 요사채는 5칸 혹은 9칸의 큰 규모로 지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전까지는 불과 10여 명의 승려들만 기거하는 소규모 사찰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임진왜란 때 범어사가 불타 버리고, 1602년 관선사(觀禪師)가 일부를 복구하지만 또 큰불로 전소되었다. 1613년 묘전(妙全)이 주지를 맡으면서 본격적인 복구가 이루어졌다. 먼저 3칸의 해회당(海會堂)을 짓고, 다시 대웅전과 관음전, 심검당(尋劒堂) 건립을 시작으로 이후 80여 년간 복구공사가 지속되었다. 1658년(효종 9) 자수(自修)와 해민(海敏) 등이 법당을 새로 지으면서 훼철 재목으로 지장전을 짓고, 1662년 조계문을 짓는 등 사역도 크게 넓혀 나갔다. 1694년(숙종 20) 해민 등이 비로전과 조계문을 중수하고, 1699년 청풍·심검·원응·안심·함홍·해행·침계·금당 등 8방사를 신축하였고, 1700년 보제루와 종각을 창건함으로써 불전과 요사 및 문루 등을 갖춘 대가람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수십 년간 이루어진 복구공사를 통해서 대가람으로 성장한 범어사는 조영 기반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승려들은 가장 뛰어난 역군이었고, 특히 그중에는 기술이 뛰어난 목수도 많았다. 이른바 승인 공장(僧人工匠)이라 불리던 그들은 사찰 조영은 물론, 부산 지역의 각종 관아 조영에서도 최고의 기술자로 일하였다. 특히 18세기 부산의 관아 건축은 범어사 승인 공장 일색으로 구성되어 범어사와 건축 면에서 유사성을 가진다. 즉 맞배지붕에 포작(包作)하는 실용주의적 수법이나 누하주(樓下柱)에 장대 석주(長大石柱)를 사용하고 있다.
범어사의 일주문과 대웅전은 건축 법식과 의장 수법에서 이 지역 건축을 대표한다. 특히 두 건물은 당시 최고 기술자인 조헌(祖軒)이란 승려가 우두머리인 도편수[도대목]을 맡았는데, 조헌은 1704년(숙종 30) 동래 향교 이건 공사와 동래부 동헌 및 객사 등의 공사도 담당하였다.
일주문은 흔히 큰 막돌 위에 그레질해서 기둥뿌리를 맞춘 덤벙 주초 형식이 아니라 3칸 가구의 맞배지붕을 받치는 4개의 기둥이 긴 석주로 되어 있다. 1718년(숙종 44) 중건 때부터 만들어진 이러한 기법은 부산 지역에서 그 유례를 찾을 수 있다. 부산 범어사 대웅전의 전면 좌우 기둥과 자성대 서문의 옛 기둥 2주, 그리고 망미루와 동래 향교 번화루의 누하주 등이 같은 형식이다.
이 밖에 심검당과 비로전, 미륵전, 관음전, 팔상전, 독성전 등 거의 모든 불전들은 맞배지붕을 올렸다. 맞배지붕은 팔작지붕에 비하여 가장 큰 부재인 추녀와 사래, 귀첨 선자서까래가 없어도 되고, 양 측면에 공포를 짜지 않고 풍판만 달아도 된다. 따라서 부재를 크게 줄일 수 있고 공역도 대폭 절감할 수 있는 형식이다. 이는 임진왜란 이후 목재 부족과 공장 노임에 대한 부담이 증가하는 데 따른 실용주의적 경향을 잘 보여 준다. 유독 부산 지역에서 이러한 형식의 석주가 여러 곳에서 사용된 이유는 잦은 태풍에 의한 나무 부재의 부식을 막기 위한 조치로 추측되며, 이는 부산 건축 양식의 지역적 특성이기도 하다.
[성관 건축-동래 읍성]
동래 읍성은 1446년(세종 28)에 축조된 이래 1547년(명종 2)에 도호부로 승격되어 수축하고, 1591년(선조 24) 삼남의 군사 시설을 점검하면서 수축하였지만 임진왜란 때 파괴되었다.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에 “동래 읍성의 둘레가 3,092척[약 936.97m], 높이 15척[약 4.55m], 창고와 우물이 있다”라고 되어 있다. 이후 폐허화된 동래 읍성 수축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이에 동래 읍성은 1731년(영조 7) 기존의 규모보다 6배가량 큰 새로운 방어 시설을 갖춘 성곽으로 설계되었다.
왜구에 대한 방비책의 일환이지만, 1728년(영조 4) 무신난(戊申亂) 직후 혼란해진 지역의 안정과 국왕의 통치권을 강화하는 차원에서 관찰사 조현명(趙顯命)과 부사 정언섭(鄭彦燮)이 공사를 주관하였다. 국왕의 측근으로 탕평책의 핵심 인물들이 추진한 만큼 공사는 몇 년씩 소요되던 종전과 달리 4개월이란 짧은 기간에 마무리되었다. 개혁적인 인물들에 의한 새로운 공사 기법과 공역 절감 노력의 결과였다. 영조 연간의 축성으로는 동래 읍성이 최초였다.
실제로 동래 읍성은 둘레가 약 5,239.7m[1만 7291척]로 종전의 약 936.36m[3,090척]에 비해 6배나 커졌고, 높이는 약 3.94m[13척]에서 약 5.15m[17척]로, 성가퀴[女堞]는 약 19.24㎏[513량]에서 약 49.43㎏[1,318량]으로 3배가량 늘어났다. 성문도 단층에서 중층으로 바뀌고 옹성과 암문(暗門) 등 새로운 방어 시설이 크게 보강되었다. 우물의 수가 늘어난 것도 민호의 수가 증가한 것을 반영한다. 이렇게 읍성 규모가 커진 이유는 이처럼 새로운 시설이 보강되었기 때문이다.
동래 읍성의 이러한 변화는 달라진 방어 개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 하삼도의 읍성으로는 가장 앞서 개축된 만큼 그간 제기된 개혁적 성설(城說)과 새로운 성제(城制)가 최초로 적용되었다. 먼저 평지 읍성 중심의 방어 개념이 최초로 구현된 점이다. 종전의 산성 대신 평지 읍성이 방어 거점이 되기 위해서는 언제든 수성군(守城軍)으로 전환이 가능한 많은 상거민(常居民)의 수용을 위한 위곽(圍廓)의 대폭적인 확대가 필요하였고, 새로운 총전 및 포전에 대응할 수 있는 치성과 옹성·암문 같은 새로운 시설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개혁적 성설은 임진왜란 중 명나라 장수 척계광(戚繼光)의 『기효신서(紀效新書)』 도입을 계기로 유성룡(柳成龍)을 비롯해서 유형원(柳馨遠)과 홍여하(洪汝河) 등에 의해 제기된 바 있다. 그러나 병자호란의 강화 조건인 정축 조약에 따라 축성이 일절 금지되다가 비로소 동래 읍성에 처음 사용되기에 이른다. 이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조현명이 쓴 『축성 계초(築城啓草)』에 산성만을 강조하던 당시의 성설을 비판하고 읍성의 개축을 강조한 것에서 그러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특히 동래 읍성 축성 경비의 조달 방식은 이후에 중요한 선례가 되었다. 즉 조현명과 정언섭이 요판취리(料瓣取利)에 의해서 자체적으로 조달하였다. 당시 동래부는 왜관을 중심으로 한 무역 업무를 관리하면서 지역 경제가 활성화된 상태였다. 통상적인 전결세(田結稅) 외에 왜에 지급되던 공작미(公作米)를 관리하면서 많은 이익을 남겼다. 이렇게 마련한 재원을 동래 읍성 축조에 사용한 것이다.
동래부는 1740년(영조 16)까지 왜관의 업무 등 많은 행정 업무가 늘어났다. 각종 관아 조영이 활발해지면서 관아 시설이 크게 확충되었는데, 특히 지역의 경제력이 크게 향상된 숙종과 영조 연간에 많은 건물이 세워졌다. 관사류(官司類)로는 충신당·독경당·연심당·객사 등이 지어졌고, 청사류(廳舍類)로는 별관·향교·중군청·장군청 등이 기록되어 있다. 기타 창고 및 고직사(庫直舍)로는 사령 수직고(使令守直庫)·접빈청·접위청·군기고·대동고 등이 있고, 부속사도 수없이 많다.
이러한 관아의 증축과 개축은 이후에도 계속되었겠지만, 조영 내용은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다가 1870년(고종 7)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의 쇄국 정책에 따라 주요 관방의 성곽과 관아를 정비할 때 관련 사항을 기록한 『성역급 각 공해 중수기 각양 등록급 절목 초책(城役及各公廨重修記各樣謄錄及節目草冊)』에 당시 읍성 개축과 관아 조영에 관여한 감역과 패장, 공장의 이름과 함께 재원 내역을 기록하고 있다.
당시 공사는 부사 정현덕(鄭顯德)의 주도로 1869년 봄부터 1871년 10월까지 52종 건물 312칸을 새로 짓고, 35종 건물 341칸을 수리하였다. 여기서 동헌과 객사는 이미 1700년대 중반 이래 유지되던 것을 이 무렵에 증·개축하였고, 청사와 창고는 많은 건물이 새로 지어졌다. 다만 1708년 중창된 객사 정전인 봉래관의 규모가 38칸에서 52칸으로 늘어났다. 동헌 일곽도 충신당의 규모에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변함없이 유지되었다.
이에 반해 청사와 창고는 건물의 수도 늘고 규모도 한층 커졌다. 특히 군사용 건물을 새로 짓거나 수리하였는데, 포군 설치와 관련하여 친병위청(親兵衛廳)과 도훈현청 등이 지어졌고, 수성청·방장청·병방소·사정 등이 수리되거나 신설되었다. 또한 창고 건물로 수창이나 수성청 군기고, 화약고, 군기 화약고 등도 새롭게 단장하는 등 군용 시설이 크게 보강되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동래 읍성이 강제로 헐리고, 부속 건물은 온천장 등지로 옮겨져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동헌 등 6개에 불과하다. 또 남은 것도 일부는 온천장 등 다른 곳에 위치하여 동래 읍성의 본래 형태를 전혀 추측할 수 없다.
[왜관 건축-초량 왜관]
왜관은 대일 외교의 무역과 외교 활동의 창구로 기능한 곳이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부산포에 왜관이 설치되었고, 임진왜란 이후에는 절영도 왜관과 두모포 왜관에 이어 초량 왜관이 설치되었다. 초량 왜관은 1678년(숙종 4)에서 1912년까지 230여 년간 지속되었다. 1675년(숙종 1)에 공사를 시작하여 동서 245보, 남북 205보의 약 36만 3636.36㎡[약 11만평] 대지에 동관 삼대청(東館三大廳)과 서관 삼대청(西館三大廳) 및 왜 측 사조가사(私造家舍) 등 56종 796칸의 가사(家舍)와 장원 안팎을 포함하여 도합 1,632칸에 상주인구가 1,000명이 넘었다. 이러한 규모는 일본 나가사키[長崎]의 중국 거류지인 당인옥부(唐人屋敷)의 10배, 네덜란드 상인 거류지인 출도의 25배에 달하는 것이었다.
초량 왜관은 소유자가 조선이었으나, 일본인들이 사용하였으므로 조선식과 일본식 건물이 병존하는 복합적인 양상을 띠었다. 조선에서는 왜관 건물이 일본식 일색으로 될 것을 우려하여 왜 목수에 의한 공사를 반대하였다. 절충한 결과 상당수의 왜 목수와 각종 건축 재료, 공구 등의 반입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공사의 주축은 조선 기술자였다. 동래부를 비롯해서 각 군진 소속의 공장들과 승인(僧人) 공장, 민간 공장 등이 주축이 되어 공사가 이루어졌다.
왜관 공사에는 3만 1,287명, 목수와 조역(助役) 및 취반승(炊飯僧) 2,230명이 동원되었다. 여기에 150명의 왜 목수와 역군이 함께 참여하고, 다다미와 장자·목재 등도 일본에서 실어 왔으나 조선 측의 건설 방식으로 추진되었다. 그러나 일본에서 왜 목수가 동원되고 건축 자재도 실어 오는 등 일본식이 상당 부분 적용되었던 것 같다. 즉 일본 측은 왜관이 조선집과 다르기 때문에 왜 목수가 반드시 있어야 제대로 양식을 갖출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1751년(영조 27) 서관 삼대청과 오행랑(五行廊)을 보수공사할 때 일본 집은 조선집과 짓는 제도가 다르고, 기이하고 정밀할 뿐 아니라 대청 대들보 위 장식이 중첩되어 왜 목수가 아니면 모양을 낼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에 조선에서 왜 목수를 고용해서 역가(役價)를 지불하는 방식으로 사역을 시켰다. 이와 함께 목재는 쓰시마 섬[對馬島], 주춧돌은 절영도, 기와는 김해의 기왓가마[瓦窯]에서 매입하였다. 그 밖의 물자는 모두 일본에서 가져왔고, 왜 목수가 쓰는 연장도 함께 가져왔다. 이렇게 200여 년간 21차례에 걸친 초량 왜관 공사는 조선 목수는 일본 건축을 경험하고 왜 목수는 조선 건축을 경험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양국의 건축 기술과 법식은 물론 건축 자재와 연장, 기술 등이 상호 교류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