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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출판노동조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0352
한자 釜山出版勞動組合
영어의미역 Busan Publishing Labor Union
분야 문화·교육/언론·출판,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보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노동조합
설립 시기/일시 미상
이전 시기/일시 1925년 11월 1일 - 부산 중도정 2정목으로 이전
개칭 시기/일시 1925년 11월 1일 - 부산인쇄공조합으로 개칭
개칭 시기/일시 1928년 6월 30일연표보기 - 부산인쇄공조합에서 부산출판종업원조합으로 개칭
개칭 시기/일시 1928년 12월 2일연표보기 - 부산출판종업원조합에서 부산출판노동조합으로 개칭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25년 6월 21일 - 정기총회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25년 11월 1일 - 정기총회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28년 6월 30일 - 정기총회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28년 12월 2일 - 창립 5주년 기념 대회 개최
최초 설립지 부산출판노동조합 - 부산광역시 일대
주소 변경 이력 부산출판노동조합 - 부산광역시 서구 부용동[부산부 중도정 2정목]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지역에 있었던 출판노동자 조합.

[설립 목적]

식민 지배로 들어가면서 산업 노동자 계층이 증가하였으나 이들의 노동 조건은 최악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해 자연스럽게 노동자들의 저항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3·1 운동을 경험하면서 노동자들의 정치의식도 높아지고 노동 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회주의 사상의 보급과 더불어 1920년대 노동 운동이 성장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부산의 출판 노동자들의 친목 및 단결을 도모하고 유관 단체와 연대를 위해 설립되었다.

[변천]

부산출판노동조합은 출범 시기는 명확치 않지만 초기에는 인쇄공들의 친목 단체로 출발했다. 1925년 6월 21일 열린 제2회 정기 총회에서 회장제로 운영하던 것을 위원제로 개정하고 위원장에 김칠성(金七星)을 비롯하여 20명의 위원을 선출하였다. 1925년 11월 1일의 정기 총회에서는 명칭을 부산인쇄공조합으로 변경하기로 결의하였다. 조합의 사무실도 중도정(中島町) 2정목[현 부산광역시 서구 부용동]으로 옮겼다. 이때부터 단순한 친목 단체를 넘어 노동조합의 성격을 띠게 된 것으로 파악된다.

1928년 6월 30일 단체명을 부산출판종업원조합으로 변경하였다가 1928년 12월 2일에 열리는 조합 창립 5주년 기념 정기 총회에서 다시 부산출판노동조합으로 변경하기로 위원회에서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 총회는 당국의 금지로 예정대로 열리지 못했다. 노동조합으로 명칭을 변경하는 그 즈음부터 일제 경찰의 탄압에 직면하여 이른바 ‘부산 출판 노조 사건’이라는 회오리를 맞게 되었고, 이후 단체의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었다. 부산출판노동조합의 해체 과정에 관해서는 자세한 사항을 알 수 없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부산인쇄공조합은 1925년 11월에는 고용주 단체인 인쇄동업조합에 9시간 노동제와 야근 폐지, 최저 임금 인상 등 8개 항의 요구 조건을 내걸었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동맹 파업을 벌이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벌였다. 단체 명칭을 노동조합으로 바꾸고 파업 등의 적극적인 활동을 벌이자, 일제의 경찰은 관련 조합원들을 무작위로 검거하고 수색하기 시작하여 이른바 ‘부산 출판 노조 사건’이 발생하였다. 사건의 시작은 1928년 11월 28일 두 명의 조합 간부 상무근(尙戊根)과 김칠성이 경찰에 체포되어 경성으로 압송되면서 시작되었다.

이를 신호탄으로 대대적인 수색과 검거 선풍이 불어 닥쳤다. 총독부 경찰은 12월 2일 예정되었던 총회를 금지시키고 조합원 60~70명이 모인 것을 해산시키며 황명석(黃命碩), 홍만수(洪萬守), 리근식(李根植), 최정파(崔靜波) 네 명을 검거하였으며 조합원들에 대한 가택 수색에 돌입하여 조합 상무 김태수(金泰秀) 외 세 명도 검거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이른바 부산 출판 노조 사건은 당시 사회적으로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그러나 일제는 당시 뚜렷한 이유도 없이 무조건적인 수색과 검거에 나섰던 것으로 보인다. 명백한 혐의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기에 재판은 시일을 끌다가 1930년 3월에 대부분 무죄로 석방되고 6명만 유죄를 선고받았다. 「치안 유지법」 위반이라는 혐의는 전부 무죄이고 6명도 「보안법」 위반이었는데 선고 내용도 박용규(朴瑢奎)와 김태수가 금고 6개월이고 김환성(金煥性) 외 3명은 구류 10일에 불과하였다. 이 사건으로 와해 상태에 있던 부산출판노동조합은 조직을 재건하기 위해 1929년 8월 21일 간담회를 개최하여 집행 위원장에 김용이(金龍伊)를 비롯하여 집행부를 다시 선임하였다. 1930년 1월 당시 조합원 수는 230명 정도였다.

[의의와 평가]

부산출판노동조합은 노동 여건의 개선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면서 노동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이를 탄압하면서 부산출판노동조합 간부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하였다. 당시는 1920년대부터 사회주의 사상이 점차 확산되어 가고, 노동 운동도 점차 조직화되어 가면서 현장에서 쟁의도 점차 늘어가던 시기로, 부산출판노동조합의 활동 기록을 통해 그 모습을 살펴 볼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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