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03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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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釜山記者團 |
영어의미역 | Busan Journalists Association |
분야 | 문화·교육/언론·출판,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보영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지역에 있었던 한국인 기자 단체.
[설립 목적]
일제 강점기 부산 지역에서는 한국인 발행 민간지의 지국장과 기자들이 중심이 되어 언론 활동을 하면서 기자단을 구성하였다. 1924년 4월 15일 시대일보 부산지국 사무실에 부산의 기자들이 모여 기자단 창립총회를 열고 부산기자단(釜山記者團)을 출범시켰다.
[변천]
1924년 4월 부산기자단의 창립총회는 각 신문사 지국 기자 12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이때의 총회에서 민간 3지의 부산지국장들이었던 김국태, 김용진, 황기수 3명이 간사로 선임되었다. 1925년 말 부산 지역 청년 단체들의 연합체 결성을 둘러싸고 내부 갈등이 빚어지면서 이를 보도하던 신문들까지도 서로 달리 보도하며 대립이 빚어졌다. 당시 언론인들도 대부분 각종 청년 단체나 사회단체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것이 일반적이었다.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이 보도에까지 영향을 미치면서 이러한 대립이 빚어졌던 것이다. 여러 가지 내분을 겪으면서 부산기자단은 동아일보를 제외한 나머지 신문사만으로 운영되었다. 이러한 내홍 속에서 부산기자단이 활성화되기는 어려웠다.
부산기자단은 1926년 9월 12일에는 회칙 중 ‘조선문 신문, 잡지 기자로써 조직한다’는 조항을 삭제함으로써 일문지 기자들도 가입할 수 있도록 자격 요건을 완화하였다. 이는 아마도 1925년 말의 내분으로 동아일보가 배제되어 기자단의 규모가 축소되어 활성화되지 못했던 사실도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부산기자단의 활동은 계속 침체되는 양상을 보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1929년 5월 16일에 부산기자단은 다시 창립 대회를 개최하기에 이른다. 부산의 매일신보와 중외일보, 조선일보, 동아일보 네 신문사 기자들이 모여 기자단을 조직하고 강령 및 규약도 제정하였으며 동아일보 지국장 강영순을 간사로 선임하고 동아일보 부산지국 사무실에 기자단 사무실을 두는 것으로 결의하였다. 1925년의 내분을 극복하고 다시 재출범하면서 동아일보가 주도하였던 것이다. 이는 내분 당시 동아일보와 대립각을 세웠던 시대일보가 그 사이 폐간하는 등의 변화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재출범에도 불구하고 조직 활성화에 어려움이 있었는지 1933년에는 다시 부산기자단을 혁신해 보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침체 상태에 있던 기자단에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 혁신 총회를 개최하고 조직을 일신하려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에는 잡지 기자들도 함께 참여하였다. 위원으로 선임된 중에 강정희와 서유준, 이석주가 잡지사 기자를 대표한 인물이다. 부산기자단의 해체 과정에 관해서는 자세한 사항을 알 수 없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부산기자단은 출범 당시 조직의 목적을 천명한 것은 확인되지 않지만 공동 취재가 주된 목적이었던 것 같다. 참여 신문사들이 돌아가면서 매달 당번을 맡아 그 달의 사건을 취재해서 월례회에 보고함으로써 기자단이 공유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는데, 일종의 풀(pool) 취재가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1926년 10월 김해교육회에 분규가 발생하자 이를 취재하기 위해 기자단에서 공동으로 기자를 특파하는 등 취재 권역 외에서 사건이 발생하는 경우 공동으로 특파원을 보내서 공동 취재한 사례도 보인다.
1925년 11월에는 함흥경찰서가 시대일보 지방부장 홍남표를 구인한 사건에 대해 경성의 기자 단체인 무명회가 항의와 경고의 성명을 발표하자 부산기자단도 이 사건에 대해 경고의 뜻을 담은 성명을 발표하였다. 또한, 1927년 3월에도 부산수상경찰서의 담당 경찰이 도일 노동자 문제를 둘러싸고 기자의 출입을 금지시키고 그 과정에서 폭언을 한 사건에 대해 3월 25일 항의 방문하여 공개 질의서를 보내는 한편, 26일에는 임시 총회를 개최하여 도 경찰부장의 공개 사과를 요구하고 비판 집회를 개최하며 이 과정을 기자단 공동으로 취재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처럼 취재를 방해받거나 하는 등 취재 현장에서 공동의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에 대해 공동의 보조를 취하며 대응해 나갔다.
[의의와 평가]
부산에 기자단이 출범한 것은 현재까지 알려진 범위 내에서는 경성과 인천을 제외하고는 다른 지역보다도 앞섰던 것으로 파악된다. 당시 부산에 많은 언론사의 기자가 상주하면서 취재 활동을 벌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부산의 신문뿐만 아니라 국내의 다른 지역, 즉 경성과 인천, 대구 등지에서 발행하는 신문, 그리고 일본 본토에서도 큐슈와 오사카 지역에서 발행하는 신문들도 부산에 특파원을 상주시켰다고 한다. 이는 당시 부산에 일본 거주민도 많았지만 부산이라는 지역이 그만큼 중요한 거점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인 발행 민간지들의 연대 모임은 중요한 의미를 시사한다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