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03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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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釜山日報-近代- |
영어의미역 | Busan Ilbo [Modern] |
분야 | 문화·교육/언론·출판,역사/근현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연속 간행물 |
지역 | 부산광역시 중구 광복동|중앙동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김보영 |
[정의]
근대 부산에서 창간하여 발행된 대표적인 일본인 신문.
[창간 경위]
『부산 일보(釜山日報)』[근대]는 1905년 2월에 부산 변천정(辨天町)[현 부산광역시 중구 광복동 일대]에서 『조선 일보』라는 제호로 창간되었으나 창간 후 얼마 안 되어 제호를 『조선 시사 신보』라고 바꾸었다가 1907년 10월부터 『부산 일보』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형태]
판형은 타블로이드판[가로 39.3㎝, 세로 54.5㎝]이며 발행 면수는 1913년부터 4면에서 6면으로 증면, 1917년 2월부터 8면으로 증면 발행하였다. 1923년 1월 15일부터는 조석간 발행 체제로 들어갔고, 1925년 조간과 석간 각 4면씩 총 8면을 발행하였다. 1929년 조간 6면, 석간 4면 총 10면 발행, 1934년 11월 1일부터 조석간 12면으로 증면 발행하였다. 1940년 『조선 시보』와 『남선 일보』와 통합하면서 발행 면수는 석간 4면, 조간 2면으로 축소하였다.
[구성/내용]
『부산 일보』는 편집국 조직이 경파(硬派)와 연파(軟派)로 나뉘어 있었다. 이는 아마도 뉴스를 분류할 때 경성 뉴스와 연성 뉴스로 나누는 데 기초한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경파란 정치, 경제 관련 뉴스나 논평, 해설 등 흥미보다는 실제 필요한 정보 중심의 뉴스를 말하고 연파는 이와 달리 지식이나 정보가 되기보다는 흥미 위주의 가벼운 읽을거리 중심의 뉴스를 말한다.
[변천과 현황]
『부산 일보』로 제호를 변경하면서 아쿠타가와 타다시[芥川正]가 초대 사장을 맡게 되었는데, 아쿠타가와 집안의 개인 소유 회사로 세습되어 운영되었다. 1915년 자본금은 4만 원이며 소재지는 변천정 3-3으로 되어 있다. 1915년 11월 26일 사옥에 화재가 발생하여 공장 등의 시설을 다시 건축하였으며 1916년 7월에 윤전기를 구입, 1917년 2월부터 다시 8면으로 증면하면서 구독료도 50전으로 인상하였다. 이때에 조선어 면도 신설하여 조선 독자들을 대상으로 시장 확대를 노리는 기획을 시도하였다.
1919년 2월 1일에는 개인 경영을 탈피하여 자본금 25만 원의 주식회사 체제로 전환하였으며 안본정(岸本町)[현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동 일대]에 사옥을 신축하여 1920년 4월에 준공하였다. 이때부터 그동안 영업부장을 맡아 오던 사장 아쿠타가와 타다시의 장남 아쿠타가와 다케시가 지배인을 맡았다.
1928년 1월 6일에는 그동안 사장 겸 주필을 맡아 오던 아쿠타가와 타다시가 병으로 죽고 일찍이 부산에 진출하여 어장과 수산업을 통해 자본을 축적하였던 카시이 겐타로[香椎源太郎]가 대표로 취임하였다. 부산일보사에도 1921년경부터 투자하여 200주를 소유하고 있다가 사장이 된 이후 투자 지분을 늘려 945주까지 소유하였던 대주주였다. 그러다 1932년 2월에는 카시이 겐타로가 물러나고, 전 사장의 아들 아쿠타가와 히로시가 사장에 취임하였다.
1931년 1월 27일에도 화재가 발생하여 사옥이 전부 타 버리는 손실을 입었다. 화재로 사무실을 잃은 부산일보사는 인근 공회당 내의 사무실을 빌리고 시내 인쇄소를 통해 임시로 두 면을 발행하였다. 이를 계기로 사옥을 다시 재건축하고 재정비하여 1932년 2월에는 일본 신문계의 원로로 정평이 나 있는 시노자키 쇼노스케를 부사장 겸 편집국장으로 영입하였다.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0년부터 일제는 언론 통폐합을 실시하면서 1도 1사의 방침을 세운다. 이 방침에 따라 부산과 경상남도 마산 지역에서 발행되던 『조선 시보』와 『남선 일보』는 1941년 5월 27일 『부산 일보』와 통합하여 자본금을 10만 원 증액하여 35만 원의 회사로 출범하였다. 이로써 일제 말기 『부산 일보』는 부산과 경상남도 시장을 독점하는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부산 일보』는 실업 신문을 지향한다는 편집 방침을 가지고 있었다. 동북아시아의 관문이며 일본과 가까운 지리적 특성을 지닌 조선 제2의 도시 부산을 기반으로 하는 신문이기에 정치적 성격을 드러내기보다는 불편부당(不偏不黨)을 표방하면서 경제 및 산업 정보에 치중하는 편집 방침을 내걸었던 것으로 분석할 수 있겠다. 하지만 심한 민족적 편견을 드러내는 기사를 게재하여 조선인 사회의 반발을 불러일으킨 사례가 여러 차례 있었다.
『부산 일보』는 광고 수입 면에서 조선 내에서는 대체로 총독부 기관지 『경성 일보』의 뒤를 잇는 2위 신문의 자리를 유지하였다. 광고 수입이 국내 민간지 『동아 일보』와 『조선 일보』보다 항상 많았으며 경성의 일문지 『조선 신문』을 앞서서 2위권을 대체로 유지하였다. 총독부 기관지 『매일 신보』보다도 광고량에서 앞서다가 1940년대 들어서면서 역전되었다. 이는 국내의 두 민간지가 1940년대 폐간되면서 『매일 신보』의 독자 수가 급증하며 광고량도 급증하였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일본의 신문들 중 도쿄와 오사카를 제외한 나머지 신문 중에서도 전체 20위권 이내를 항상 유지할 정도로 영향력이 있었다.
『부산 일보』는 1923년 1월 15일부터 조석간 발행 체제로 들어갔다. 이는 한국의 민간지들보다 앞선 것이었다. 『조선 일보』는 1924년 11월 23일부터, 『동아 일보』는 1925년 8월 1일부터 조석간 발행을 시작하였다. 『부산 일보』가 이들 민간지보다 앞서서 조석간 발행을 시작한 것은 일본의 관행을 도입한 것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