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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전시연합대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6938
한자 釜山戰時聯合大學
영어의미역 Busan Wartime Nations University
분야 문화·교육/교육
유형 기관 단체/학교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안경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고등 교육 기관
설립자 문교부
인가 시기/일시 1951년 2월 - 개설
폐교 시기/일시 1952년 3월연표보기 - 해산
최초 설립지 부산전시연합대학 - 부산광역시

[정의]

6·25 전쟁 시기 부산 지역에 있었던 임시 연합 대학.

[변천]

1·4후퇴 이후 부산시청 건물 내에 집무하고 있던 피난 문교부가 ‘전시 교육 특별 조치에 관한 요강’을 제정 발표하였다. 즉 피난 중인 초·중등학교 학생들을 피난지 학교에 편입시키거나 사정이 허락되어 임시 교사라도 준비되는 학교에 대해서는 단독으로 수업을 재개하도록 하고, 한편 대학에 대해서는 원주지 대학, 피난 대학 할 것 없이 모든 국공립·사립 대학을 전시연합대학 산하에 결합시켜 우선 가능한 도시를 단위로 하여 수업을 재개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부산전시연합대학을 시작으로 광주, 전주, 대전에서도 설치되었는데, 부산전시연합대학에서는 4,268명, 대전전시연합대학에서는 377명, 전주전시연합대학에서는 1,283명, 광주전시연합대학에서는 527명 등 총 6,455명이 공부하였다.

문교부령 제19호 「대학 교육에 관한 전시 특별 조치령」 제4조 ‘단독으로 수업을 실시할 수 없는 대학은 정상한 수업이 가능한 때까지 전시연합대학의 명칭으로 문교부 장관의 승인을 얻어 합동 수업을 실시할 수 있다’에 따라 부산전시연합대학이 설립되었다. 당시 유진오를 중심으로 결성된 ‘대한민국교수단’과의 협의하에 발족되었다.

부산전시연합대학은 1951년 2월에 학장 유진오[고려대학교], 부학장 윤인구[부학장], 방종현[서울대학교 본부]을 중심으로 문학부와 이공학부, 법정 경상학부, 의약학부, 농수산학부, 예술학부, 가사과, 체육과 등을 개설하고 부산 지역의 부민관에서 서울대학교 의과 대학생 등 약 30명을 모아 놓고 강의를 시작하였다. 그 뒤 수업은 4월에 시작하였다. 이후 1952년 3월 말, 각 대학이 자체적으로 학교를 단독 개강하면서 해산되었다.

[교육 활동]

부산전시연합대학은 대학교 운영 체제를 그대로 가져왔는데, 그 가운데 강의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강의 내용은 인문, 사회, 자연계를 막론하고 전시에 필요한 기초 지식을 강의하였다. 강의 방식은 오전에 부민관에 전학생을 한곳에 모아 놓고 교양 과목인 헌법, 변증법, 현대의 자연 과학, 원자론, 사회 사상사, 민족 이론, 마르크스주의의 비판, 국제 헌장, 민족 해방 운동사, 전쟁과 사상, 민족주의의 개설 등을 주제로 합동 강의를 하고, 오후에는 전공과목을 강의하는 형식이었다. 요일에 따라 오후에는 군사학과 훈련이 배당되기도 하였다.

강의실은 따로 마련된 것이 아니고 유휴 건물이나 개인 사무실, 교수 사택, 창고 등을 임시 교사로 사용하였다. 합동 강의는 부민관에서 진행되었고, 전공과목 가운데 문학부 A반[어학·문학]은 서구 부민동 1가 31번지의 어느 유휴 건물에서, 문학부 B반[철학, 사학, 교육학]은 영도 남항 공설 시장 부근의 해동중·고등학교 임시 교사의 일부를 빌려서, 법정 경상학부는 부민동 1가 10번지 소재의 변재성(卞在成)법률사무소에서 각각 강의하였다.

한 학기에 30여 학점을 취득하거나 이미 이수한 과목을 중복 신청하여도 유효하였으며, 타 학과의 전공과목도 거의 제한 없이 이수할 수 있었다. 부산전시연합대학부산대학교의 교수와 직원의 참여도가 높았고, 등록 학생의 대부분이 부산대학교 학생이었으므로 사실상 부산대학교를 모체로 하고 있었다. 동아대학교는 본래의 위치에 있었고, 별도의 교사가 마련되어 있어 전시연합대학에 편입되지 않았다. 세계 교육사에서 전례가 없는 것으로 사전에 계획하였던 것이 아닌 만큼 소기의 성과를 거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전쟁 중이라도 교육은 중단될 수 없다는 의지를 보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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