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69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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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相贊 |
영어음역 | Gim Sangchan |
분야 |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사상구 주감로 32[감전동 215]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기진 |
[정의]
부산에서 평화 통일과 민주화를 위해 평생을 헌신한 활동가.
[가계]
본관은 광주(光州). 아버지는 김태선이고, 어머니는 최음전이다. 부인은 이재훈이며, 아들 김민과 딸 김현을 두었다.
[활동 사항]
김상찬(金相贊)은 1931년에 태어났다. 부산 동아중학교 3학년 때인 1948년 남한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구속되었다. 그의 기나긴 투쟁의 역정에서 첫 구속이었다. 어린 나이라는 이유로 곧 풀려났지만 좌익으로 찍혀 이승만(李承晩) 정권이 만든 좌익 전향 단체인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하게 되었다. 1950년 6·25 전쟁 초 대한민국 정부가 저지른 국민보도연맹 대학살에서 간신히 살아남았다. 군 입대가 목숨을 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군에서 3년 4개월간 복무하였다.
1954년 군 제대 후 부산대학교 정치학과에 입학하여 공부한 뒤 1958년부터 약 1년간 국제신문사에서 기자로 일하였다. 신문사에서 남북한의 통일 운동에 관한 기사를 썼다가 편집국장이 게재를 거부하자, 국장 책상 서랍 속에 있던 원고를 몰래 꺼내 신문에 실은 사건으로 교열부로 발령 나는 징계를 받았다. 이후 회사를 나왔다.
김상찬은 충청도의 한 중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대학만 졸업하면 교사를 할 수 있던 시절이었다. 그곳에서 초등학교 교사였던 부인 이재훈을 만났고, 교사 자격시험을 쳐 정식 교사가 되었다.
그러나 김상찬은 1960년부터 본격적으로 정치 투쟁에 뛰어들었다. 1960년 4월 12일 부산대학교 정치학과 교수인 이종률(李種律), 대학 동창인 하상연 등과 부산에서 민주민족청년동맹 결성하여 중앙집행위원회 간사장에 선임되었다. 이 단체는 이종률이 주창한 ‘서민성 자본주의 민족 혁명’을 기본 강령으로 급속히 세를 넓혀 갔고, 도예종·서도원 등 대구 및 경상북도 지역 진보 인사들이 가세하면서 전국적 조직으로 확대되었다. 1960년 4·19 혁명이 터지자 김상찬은 민주민족청년동맹 회원과 대학 조직들을 규합해 시위를 이끌었다.
김상찬은 1961년 2월 25일 민주민족청년동맹과 사회당 외곽 조직인 통일민주청년동맹의 결합체인 민족자주통일협의회를 결성하는 데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조직 부장에 선임되었다. 민족자주통일협의회는 통일 강령으로 민족 자주 노선을 내세우며 외세 배격을 표방하였다. 이는 김상찬이 일평생을 받친 자주 통일 운동의 근간이 되었다.
1961년 좌익 활동 혐의로 5·16 쿠데타 세력에 의해 혁명 재판에 회부되어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감형이 이루어져 약 3년간 옥고를 치렀다. 이후 부마 항쟁, 5·18 민주화 운동 등 정치 격랑을 거치면서 구속과 석방을 수없이 되풀이하였다. 그 과정에서 더욱 확고한 신념을 갖게 된 자주 노선에 대한 사상이 1989년 쓴 「민족 통일시」에 그대로 묻어난다.
“내[南]가 이기고 네[北]가 지면 우리 모두는 지는 것이요. 네가 이기고 내가 져도 우리 모두는 지는 것이요. 내가 너를 뫼셔 네가 나를 뫼셔 함께 나가면 우리 모두는 승리하리요. 이것이 통일의 길이다.”
김상찬의 민주화 운동과 통일 운동을 향한 여정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1986년 민주헌정연구회 상임 이사 및 민주화추진협의회 인권 위원 및 선임 공동 의장, 1987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부산 중앙 공동 의장과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지도 위원 겸 자주 통일 위원장, 1992년 민주주의민족통일 부산연합 공동 의장, 1993년 민주주의민족통일 중앙연합 자주통일위원장과 제4차 범민족대회중앙준비위원회 집행 위원장, 1999년 민족자주평화통일 부산회의 상임 의장 및 중앙 공동 의장으로 활동하였다. 이 일로 1991년과 1999년에 구속되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김상찬은 1994년 12월 『21세기 지구화 사회주의』라는 책을 출간하였다가 「국가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었다. 그가 재판을 받던 법정에는 방청객이 가득하였고, 변론은 문재인 변호사가 맡았다. 부인 이재훈은 김상찬이 검찰의 기소 내용의 부당성을 항변할 때 방청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고 말하였다. 재판장도 이를 저지하지 않았고, 김상찬은 이 사건에서 석방되었다.
김상찬은 이후 국가안전기획부 등 정보기관에 수없이 끌려 다녔다. 교사 생활을 하며 가정을 이끌던 부인에게 남편 면회는 일상생활이 될 정도였다. 지명 수배되어 몇 달씩 소식이 끊긴 경우도 허다하였다. 당시 김상찬은 잠을 잘 때 항상 신발을 베개 옆에 두었다고 한다. 누가 잡으러 오면 뒷문으로 도망가기 위해서였다. 부인은 물론 심지어 어린 자녀에게도 미행이 이어졌다. 교육청을 사칭하여 김상찬의 행방을 묻는 전화도 종종 걸려 왔다. 새벽에 집에 수사관들이 들이닥쳐 책을 모두 쓸어 담고 김상찬을 체포해 간 적도 있었다. 체포되면 중구 중앙동 대공 분실과 수영구 망미동에 있던 방첩 부대 등에서 조사를 받았다고 부인은 전하였다.
김상찬은 이론보다는 행동으로 실천하는 활동가였다. 이승만부터 박정희(朴正熙), 전두환(全斗煥), 노태우(盧泰愚), 김영삼(金泳三)에 이르기까지 정권마다 투옥되는 치열한 삶을 살았다. 그의 가슴에는 자주 통일에 대한 열망이 늘 가득하였다. 민족자주통일부산회의 상임 의장으로 미국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대한민국 정부의 외교, 통일 정책을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사대주의자, 극좌 극우 및 파쇼 수구 세력을 제외한 노동자, 농민, 도시민, 지식인, 민족 자산가 등이 주체가 된 전위적 정치 운동을 통해 민족의 주체 역량을 키워 나가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2000년 초에는 국민보도연맹 학살 유족인 김영욱·송철순, 『부산 일보』 기자 김기진과 6·25 피학살양민 부산경남유족회를 결성하여 고문을 맡기도 하였다. 그리고 2001년 6·15통일연대 공동 의장, 2004년 민족문제연구소 명예 회장 및 열린우리당 부산시지부 상임 대표, 2005년 6·15공동선언실천 부산본부 공동 대표로 활동하였다.
김상찬은 2007년 12월 식도암에 걸쳐 투병하다 이듬해 2월 7일 사망하였다. 그의 유언에 따라 시신은 부산대학교병원에 해부학용으로 기증되었다. 시신은 1년여가 지난 2009년 9월 19일 양산의 솥발산 공원 묘원에 안치되었다. 김상찬은 생전 유언에서 장례식을 치르지 말고 화장된 유골을 천에 담아 나무 아래에 묻어 달라고 하였지만, 그를 추모하는 동지들이 작은 나무 상자에 담아 안치하였다.
[저술 및 작품]
『21세기 지구화 사회주의』[도서출판 늘함께, 1994], 『남북 합의서 통일론』[도서출판 늘함께, 1998], 『반제 민족 자주 통일론』[인쇄골, 2005] 등과 다수의 글이 있다.
[묘소]
묘소는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답곡리 산17번지 솥발산 공원 묘원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