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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6743
한자 河相演
영어음역 Ha Sangyeon
이칭/별칭 석한(石漢),이산다농(異山茶儂)
분야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동 100-4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종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변혁 운동가
성별
본관 진양(晉陽)
대표경력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선전위원회 차장|민족자주평화통일중앙회의 기관지 『자주 통일』 편집장
출생 시기/일시 1934년연표보기 -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54년 - 하동고등학교 졸업
수학 시기/일시 1954년 - 부산대학교 정치학과 입학
수학 시기/일시 1958년 - 부산대학교 대학원 입학
활동 시기/일시 1960년 6월 12일 - 민주민족청년동맹 결성
활동 시기/일시 1961년 2월 25일 -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선전 위원회 차장에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61년 5월 - 5·16 군사 쿠데타로 구속 수감
활동 시기/일시 1979년 - 고려 다원 설립
활동 시기/일시 1990년 - 민족자주평화통일중앙회의 참여, 기관지 『자주 통일』 편집장 역임
몰년 시기/일시 2000년 5월 5일연표보기 - 사망
출생지 하상연 출생지 -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덕은리 64
거주|이주지 하상연 거주지 -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동 100-4
학교|수학지 화개국민학교 -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화개로 139
학교|수학지 진주사범학교 병설 중학교 - 경상남도 진주시
학교|수학지 중앙고등학교 - 서울특별시
학교|수학지 하동고등학교 - 경상남도 하동군
학교|수학지 부산대학교 정치학과 - 부산광역시 금정구 장전동 산30지도보기
학교|수학지 부산대학교 대학원 - 부산광역시 금정구 장전동 산30지도보기
활동지 민족문화협회 - 부산광역시
활동지 민주민족청년동맹 - 부산광역시 중구 동광동
활동지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 서울특별시
활동지 고려 다원 -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덕은리 200-1
활동지 민족자주평화통일중앙회의 - 서울특별시
묘소 하상연 묘지 -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덕은리

[정의]

4·19 혁명 당시 부산과 서울에서 통일 운동을 전개한 변혁 운동가.

[가계]

본관은 진양(晉陽). 호는 석한(石漢)·이산다농(異山茶儂). 아버지는 하병기(河炳基)이고, 어머니는 강차분(姜且粉)이다. 9남매 가운데 차남으로 태어났다. 부산대학교 철학과 교수를 지낸 하일민이 친동생이다.

[활동 사항]

1. 성장과 학업

하상연(河相演)은 1934년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덕은리 64번지에서 태어났다. 하동에서 화개국민학교[현 화개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진주로 가서 진주사범학교 병설 중학교를 마쳤다. 이후 서울의 중앙고등학교에 진학하였지만, 6·25 전쟁의 발발로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에서 하동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54년 부산대학교 정치학과[현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하였다.

부산대학교에서 하상연은 정치학과 교수로 재직하던 이종률(李鍾律)과 만나면서 인생의 결정적인 전환점을 맞았다. 이후 이종률이 제자들을 위해 자택에 지은 천하정(天下亭)이라 이름 붙인 작은 사랑채에 기숙하였다. 이때 이종률하상연에게 옥한(玉漢)이라는 호를 지어 주었다. 그러나 하상연은 “아직은 옥한이 아니라”며 스스로를 낮추며 ‘돌 석(石)’ 자를 써서 석한(石漢)이라 자호(自號)하였다. 천하정에서 이영석, 김상찬, 배다지, 조현종 등 이종률의 제자들과 함께 기거하며 학문을 익혔는데, 이들을 중심으로 이종률의 민족 혁명론을 계승하는 학맥이 형성되었다.

1954~1955년 이종률부산대학교동아대학교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결성한 민족문화협회의 활동에 참여하였다. 민족문화협회의 주요 활동은 강연회를 통해 민주적 자주 의식을 대중적으로 확산시키는 것으로, 여기에는 부산 지역의 양심적 지식인이 다수 참여하였다. 하상연이종률의 제자들은 민족문화협회의 회원이자 업무를 주관하는 실무자였다.

2. 사회운동

하상연은 1958년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하여 본격적으로 연구자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1960년 한국 사회를 강타한 4·19 혁명은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이승만(李承晩) 정권이 붕괴하자 이종률은 진보적 청년층의 조직화에 나섰고, 6월 12일 민주민족청년동맹[약칭 민민청]이 결성되었다. 이 과정에서 하상연은 중심인물로 활동하였다. 이후 서울로 가서 이수병(李銖秉) 등 부산 출신의 진보적 청년 그룹인 ‘암장’을 민주민족청년동맹에 합류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이어서 하상연이종률을 도와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약칭 민자통]를 결성하는 일에 참여하였고, 1961년 2월 25일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가 창립되었을 때 선전 위원회 차장으로 선임되었다. 이후 대외적으로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의 입장을 대변하는 각종 문건을 작성하는 활동을 도맡았다.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가 창립된 이후 선전 위원장 이재춘(李載春)의 명의로 나온 문건과 신문의 기고문 등을 실제로 작성한 이는 하상연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으로 5·16 군사 쿠데타 이후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다. 다행히 기소 면제되어 수감 생활은 수개월로 끝나고 출감하였다. 이후 하상연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의 조직 위원장이던 도예종을 중심으로 하는 청년 모임에 속하여 활동하였다. 이 때문에 1964년 이른바 ‘인혁당 사건’의 주모자로 도예종이 구속되면서 또 한 차례 고비를 맞았다. 다행히 화를 면한 뒤 고향인 하동으로 귀향하였다.

1979년 하상연은 전통 차를 현대적인 식품 산업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하동에 고려 다원(高麗茶苑)을 설립하고, 차의 개발과 대중화 사업에 몰두하였다. 한편으로 1990년 옛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의 정신을 계승하여 결성된 민족자주평화통일중앙회의에 참여하여, 기관지 『자주 통일』의 편집장으로 간행을 주관하였다. 이후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민족 혁명의 실현을 위해 노력을 기울이던 중 2000년 5월 5일 심장 파열로 사망하였다.

[묘소]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덕은리 고려다원 뒷산의 가족 묘원에 안장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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