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65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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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淨土眞宗大谷派本願寺釜山別院-東本願寺- |
영어의미역 | Jōdo Shinshū Daegok-pa Bonwonsa Temple Busanbyeolwon[Dongbonwonsa Temple] |
이칭/별칭 | 동본원사 부산별원 |
분야 | 종교/불교,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중구 광복중앙로 19-1[신창동 1가 6]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정미숙 |
[정의]
개항기 부산광역시 중구 신창동1가에 있었던 일본불교정토종 소속 사찰.
[설립 목적]
개항과 함께 일본 정부는 거류민과 조선인을 대상으로 일본 불교를 포교하기 위해 개항장을 중심으로 사찰을 세웠는데, 이에 정토진종 대곡파 본원사 부산별원[동본원사]을 설립하게 되었다.
[변천]
개항 이후 일본 정부는 정토진종 대곡파(大谷派)에 조선 개교(朝鮮開敎)를 요구하였다. 이에 정토진종 대곡파는 1588년(선조 21) 부산해 고덕사(釜山海高德寺)에 파견하였던 오쿠무라 죠신[奧村淨信]의 후손 오쿠무라 엔신[奧村圓心]과 평야혜수(平野惠粹)를 파견하였다. 이들은 1877년(고종 14) 11월 5일에 참판관(參判官) 관사(官舍)를 빌려 본원사 출장소(本願寺出張所)라 칭하고 포교를 시작하였다. 1878년(고종 15) 12월에 관의 허가를 얻어 대곡파 본원사 부산별원(大谷派釜山別院)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정토진종(淨土眞宗) 본원사(本願寺)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시대에 동서로 분리되어 두 개의 본원사로 나뉘었는데, 1873년(고종 10)에 동본원사(東本願寺)는 대곡파(大谷派)라 불리고, 서본원사(西本願寺)는 본원사파(本願寺派)[본파(本派)]로 불리게 되었다. 이에 대곡파 본원사 부산별원은 동본원사 부산별원(東本願寺 釜山別院)으로도 불리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정토진종 대곡파 본원사 부산별원[동본원사]은 기본적으로 포교, 종교 의례 등 종교 활동뿐만 아니라 소학교, 한어학사(韓語學舍), 유치원 운영 등 각종 사회 활동을 하였다. 빈민 구휼을 위한 부산 자선교사(慈善敎社)[1877]와 일본인 거류민들에게 조선어를 교습시키기 위한 한어학사[1878], 그 외에 사립 유치원[1897]과 일본부인회[1898] 등을 설립하였다. 정토진종 대곡파 본원사 부산별원[동본원사]은 일본 불교 종파 가운데 부산에 설치된 최초의 사찰로 개항기부터 신도 수가 가장 많았다. 1923년에는 일본인만 415호(戶)였으나, 1927년에는 조선인도 200호 보인다. 1933과 1934년에는 총 신도 수가 4,000호를 넘었다.
재정 면에서는 창립 이래 본산의 보조를 받아 오다가 1902년(고종 39)부터는 독립적으로 경영할 정도의 규모가 되었다. 신도의 희사금과 화장장 운영과 임대가 주된 수입원이었다. 1904년(고종 41)에 2,600여 엔을 투입하여 화장장을 설치하고, 1909년(순종 3)에는 다시 신설 공동묘지 인근으로 화장장을 옮겨 운영하였다. 일본 관리청의 구산(龜山) 관리관으로부터 임시로 빌려 쓰고 있던 사원 부지 3,194.4㎡[968평]를 영구 임대로 받아 본당을 비롯한 부속 건물을 신축하였다. 다른 지역 포교에도 적극적이어서 1907년(순종 1) 진주, 1908년(순종 2) 밀양, 1909년 삼랑진, 1910년(순종 4) 이전에 원산, 함흥, 청진, 사리원, 신의주, 진남포 등지에 포교소를 열었다.
[현황]
2013년 현재 정토진종 대곡파 본원사 부산별원[동본원사] 자리에는 대각사(大覺寺)가 자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정토진종 대곡파 본원사 부산별원[동본원사]은 개항기 일본 불교의 조선 포교 시작의 효시로서, 당시 부산에서 신도 수가 가장 많았던 대표적인 일본인 사찰이다. 그러나 조선 포교 출발은 다분히 정치적 목적에 의해 이루어졌다. 교토의 동본원사가 오쿠무라 엔신을 조선에 파견한 것은 내무대신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와 외무대신 데라시마 무네노리[寺島宗則] 등이 동본원사 관장(管長)에게 서한을 보내 포교를 종용한 데 따른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정토진종 대곡파 본원사 부산별원[동본원사]은 당시 조선의 조야 인사들과 일본 정부를 이어 주는 창구 역할을 담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