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64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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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裝身具 |
영어의미역 | Accessories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선사/선사,고대/고대,고려/고려,조선/조선 |
집필자 | 최정혜 |
[정의]
몸을 치장하는 데 쓰는 도구로 부산 지역 출토품이나 소장품.
[개설]
의복이 자연 환경으로부터 신체를 보호하는 실제적인 기능을 갖는 데 비해, 장신구(裝身具)는 기본적으로 신체를 아름답게 꾸미는 미적(美的) 추구에 목적이 있다. 한편 인간은 단순히 미적인 욕구 충족뿐 아니라 사회적·문화적 ·종교적·주술적 목적에 따라 장신구를 고안하고 신체를 장식하였다. 특히 장신구는 사회적 지위나 신분·성별의 구분·혼인 여부·소속 집단을 표시하기도 하고, 전쟁이나 수렵 때 초자연적인 힘을 빌리는 매개체로의 기능도 하였다.
장신구는 세계 각지의 여러 유적에서 발굴된 예로 보아 후기 구석기 시대에 이미 원시적인 형태가 만들어져 착용하였음을 알 수 있고, 그 기원은 동물의 이빨이나 뼈를 가공한 주물(呪物)을 몸에 붙이는 것에서 미의식(美儀式)이 가미되면서 발전한 것으로 추정된다.
[부산 지역 출토 장신구]
우리나라의 장신구 출현은 구석기 시대부터로 생각되나 아직 출토 유물이 없다. 다양한 장신구가 본격적으로 제작되고 유행한 시기는 신석기 시대라 할 수 있다.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자연과 친화하면서 적응하는 과정에서 자연 상태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이용하여 각종 수식과 팔찌·발찌·귀걸이·뒤꽂이 등을 착용하였으며, 이들 장신구는 미적인 아름다움보다 신앙과 의례 및 주술적 성격의 의미로 지녔던 것으로 판단된다.
부산에서도 부산 동삼동 패총[사적 제266호]과 범방동 패총[부산광역시 기념물 제44호]에서 신석기 시대의 장신구가 출토되어, 이 시기부터 장신구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부산 동삼동 패총인들은 쉽게 구할 수 있는 동물 뼈나 이빨·조개·옥·돌·흙의 재료로 목걸이·팔찌·귀걸이·뒤꽂이 등 각종 장신구를 만들어 몸을 치장하였을 뿐 아니라 주술적인 목적으로도 이용하였다. 동삼동 패총인들이 가장 즐겨 사용한 장신구는 조개 팔찌로, 조개의 정상부에 구멍을 뚫어 타원형으로 갈아 제작하였다.
귀걸이는 연옥제 고리형과 토제 삽입형 두 종류가 출토되었다. 삽입형은 고리형과 달리 귓불에 구멍을 뚫어 삽입하여 장식하는 것으로 흙을 구워 만들었으며 형태는 원반형을 이루는데 동심원문과 점렬문(點列文)[점줄무늬]을 장식하였다. 범방동 패총에서는 인골의 부장품으로 골제 뒤꽂이와 옥제 목걸이가 출토되었다.
농경문화를 바탕으로 한 청동기 시대의 장신구는 주술적인 의미를 포함하여 신분과 집단 내의 역할을 상징하는 형태로 발전하였으며, 특히 도구와 가공 기술의 발달로 천하석과 벽옥을 이용한 장신구 및 다양한 형태의 옥제품이 유행하였다. 정관 신도시 개발 지구 내 방곡리 유적의 주거지에서 환옥(還玉)이 2점 출토되어 이 시기 부산에서도 옥제품의 장신구가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삼한 시대가 되면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유리 제조 기술을 토대로 다량의 유리옥이 제작되었고, 수정·마노·호박 등과 철과 동을 이용한 화려한 장신구가 제작되었다. 고구려·백제·신라·가야의 고대 국가 출현과 더불어 전개되는 삼국 시대가 되면 앞 시기와 전혀 다른 장신구 문화가 꽃피게 된다.
특히 금은과 각종 옥을 이용한 화려하고 다양한 장신구가 유행하고 관이나 허리띠 장식 등 일부 장신구는 미적인 목적뿐만 아니라 신분이나 계층을 표시하는 상징물로 이용되었다. 1세기경으로 편년되는 구서동 유적에서 천하석 곡옥(曲玉)이 출토되었으며, 같은 시기의 노포동 유적 4호 묘에서는 곡옥과 수정 철자옥이 검출되었다.
4~5세기의 부산 복천동 고분군에서는 금동 관과 귀걸이·목걸이 등 각종 장신구가 출토되었는데, 금제품보다는 금동제나 유리제가 많으며 수정이나 마노·호박·수정 같은 보석류도 원료로 이용되었다. 지배층의 상징물인 금동 관은 3점이 출토되었는데, 1호에서는 출자형 관식(出字形冠飾)이 2점, 11호에서는 수지형 관식(樹支形冠飾)이 1점 검출되었다. 특히 11호 금동 관은 한강 이남 지역 출토품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에서 가장 많이 출토된 장신구는 유리옥으로 만든 목걸이이며, 금 또는 금동으로 만든 귀걸이는 대부분 날개 없이 작은 고리만 있는 간단한 형식이다.
통일 신라 시대에 해당하는 시기의 유적에서 확인된 장신구는 아직 없으며, 고려 시대의 것으로는 구포 덕천동 고분군에서 동곳과 은곳·구슬이 출토되었다. 모두 널무덤[木棺墓]에서 출토되었는데, 유리구슬은 17점으로 청록색·황갈색·유백색·옥색·호박색 등 다양하다. 머리가 풀어지지 않도록 고정하는 데 사용하는 장신구인 동곳과 은곳이 각각 1점씩 출토되었다.
조선 시대 장신구도 덕천동 유적에서 반지와 유리구슬이 출토되었다. 반지는 5점이 출토되었는데, 모두 청동으로 만들었으며 표면에 문양은 없다. 유리구슬은 황갈색과 암갈색 등 14점이 출토되었으며, 19호에서 출토된 유리구슬은 팔찌로 추정된다. 출토품 이외에 부산광역시립박물관 등 대학 박물관에도 조선 시대 장신구류가 소장되어 있다. 부산광역시립박물관에는 주로 조선 시대 후기 여자들이 사용한 비녀·노리개·뒤꽂이·떨잠·빗치개·주머니·반지 등이 있다.
발굴 조사를 통하여 부산 지역에서도 신석기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장신구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특히 덕천동 유적의 조사를 통해 부산에서 사용된 유리구슬·동곳·은곳·반지 등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큰 성과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