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57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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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釜山福泉洞古墳群六十九-七十一號出土板狀鐵矛 |
영어의미역 | Iron Hat Excavated from the Ancient Tomb Sites 69 and 71 in Bokcheon-dong in Busan |
이칭/별칭 | 복천동 69·71호분 출토 판상 철모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물/유물(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로 66[복천동 50]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이현주 2 |
[정의]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의 부산 복천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삼국 시대의 판상 철모.
[개설]
형태상으로는 근접전에서 찌르는 무기인 투겁창[철모]과 동일하나, 몸통부 단면이 편평하고 판상을 이루고 있어 무기로 기능하기에는 적당하지 못한 철기류를 판상 철모라고 한다. 판상 철모는 길이 2~30㎝ 내외의 단신형과 40㎝ 이상의 장신형이 있다. 장신형의 판상 철모는 2세기 대부터 경주와 주변 지역에서 출토되기 시작하여, 3세기 후반~4세기 대에는 무덤의 중앙에 철도 레일처럼 깔아서 관대(棺臺)로 사용한 예들이 많다. 이를 통해 볼 때 판상 철모의 용도를 무기형 의기로 규정할 수 있으며, 판상 철모를 대량 매납하는 행위로 보아 지배자의 군사적 권위와 철 생산 시스템에 대한 지배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철제 의기라고 이해할 수 있다.
1980년에서 2008년까지 부산 복천동 고분군[사적 제273호]에 대한 제1~8차 발굴 조사가 실시되었는데, 부산 복천동 고분군 69·71호에서는 4~5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판상 철모가 출토되었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 69·71호 출토 판상 철모(釜山福泉洞古墳群六十九·七十一號出土板狀鐵矛)는 현재 부산대학교 박물관과 복천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단신형 판상 철모는 부산 복천동 고분군 4호, 10·11호, 21·22호, 39호, 53호, 57호, 69, 71호 등에서 확인되었으며, 장신형 판상 철모는 38호, 60호, 81호 등에서 출토되었다. 특히 부산 복천동 고분군 38호와 60호의 장신형 판상 철모에는 궐수문(蕨手文)이 장식되어 있어 특징적이다.
판상 철모란 신부 단면을 편평한 장방형 철판으로 사용하였다는 점에서 특징지어진 명칭이기 때문에 신부 단면 형태가 중요한 요소이며, 선단부를 ‘︿’ 모양으로 뾰족하게 재단하여 찌르기 위한 ‘창(槍)’을 의도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한다.
[형태]
부산 복천동 고분군 69호에서 출토된 판상 철모의 크기는 길이가 29.6㎝, 폭이 4.8㎝로, 철판의 한쪽에 칼집을 내고 철판을 둥글게 오므려 투겁[자루와 같이 가늘고 길게 생긴 물건의 끝에 씌우는 것]을 만든 것도 있다. 대체로 투겁이 열려 있고, 나무 자루를 꽂은 후 고정을 위해 끈으로 감은 예도 있는 것으로 보아 매납 시 자루를 꽂아 놓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 71호에서 출토된 판상 철모는 길이가 21.2㎝, 폭이 4.4㎝, 관부(關部)[신부와 투겁의 경계 부분] 폭이 6㎝로 관부가 비교적 강조된 형태이다. 역시 투겁의 방향과 가로지르게 유기질 흔적이 남아 있는데, 자루를 고정하기 위한 끈으로 추정된다.
[특징]
판상 철모의 출토 예가 빈번한 경주 지역과 비교한다면, 부산 복천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판상 철모는 비교적 단신형 판상 철모가 다수를 차지한다. 이들 판상 철모는 출토 정황에서 미늘쇠와 동반되고 규격도 동일한 것으로 보아 미늘쇠, 판상 철모, 곡도자로 연결되는 무기형 철제 의기류의 한 종류로, 그것이 상징하는 바가 동일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부산 복천동 고분군을 비롯한 낙동강 하류역의 고분군에서는 판상 철모보다는 덩이쇠를 대량 매납하는 매장 의례를 통해서 지배자의 권위를 철 생산 시스템의 장악에 크게 비중 두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 점이 경주 지역과 다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의의와 평가]
부산 복천동 고분군에서의 판상 철모 출토 양상은 4세기에 한정되지 않고 5세기 후반까지 지속되며, 미늘쇠, 곡도자 등 무기형 철제 의기류의 출토 양상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부산 복천동 고분군의 조영 세력이 가지는 정치적 색채가 표현된다고 할 수 있다. 즉 금관가야 연맹체의 일원이면서, 의기를 통한 의례 행위에서는 신라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