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52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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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辛泳甲 |
영어음역 | Sin Yeonggap |
분야 |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영도구 동삼동 61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종세 |
[정의]
부산 지역에서 활동한 교사이자 사회 운동가.
[활동 사항]
1. 일제강점기의 활동
신영갑(辛泳甲)은 1912년 경상남도 창녕군 길곡면 길곡리에서 영세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1929년 경상남도 밀양에서 무안보통학교[현 무안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가난한 수재들이 몰려드는 경성사범학교[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 응시했으나 낙방하였다. 1927년 마산상업고등학교[현 마산용마고등학교]에 입학한 그는 마산소년동맹이 문맹 퇴치를 위해 경영한 야학(夜學)에서 교사로 활동하며 학업을 이어 갔다. 하지만 학비를 감당하지 못해 결국 1년 만에 학교를 그만두고, 1928년 진주사범학교[현 진주교육대학교]에 입학하였다.
3학년이 되던 1930년 봄, 신영갑은 진주사범학교 독서회에 가입하였다. 이 무렵의 진주사범학교 독서회는 마르크스주의 서적 학습 모임으로, 당시 독서회의 회원 가운데 많은 이가 후일 고려공산청년동맹과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 등 공산주의 운동에 참여하였다.
1931년 진주사범학교를 졸업한 신영갑은 부산의 사상공립보통학교[현 사상초등학교]에 부임하여 교사로서 첫 발을 내딛었는데, 교육 현장에서 그는 민족 해방과 사회 변혁을 지향하는 헌신적인 교사가 되고자 하였다. 1933년 3월 28일 부산을 중심으로 마산 등지의 교원들이 경남적색교원노조를 결성하자 신영갑은 4월 상순 여기에 가입하였다. 경남적색교원노조는 경상남도 지역의 교원 조직과 노동자 조직을 비롯하여 전라북도의 적색 교원 조직 및 전라남도의 여수 노조 등과 함께 연대한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의 일부였다. 부산의 조직은 김경출, 최명석, 신영갑 등 진주사범학교 출신이 중심을 이루었다.
신영갑은 수업을 통해 학생들에게 제국주의 일본과 전쟁에 대한 반대,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와 무산 계급의 해방을 가르쳤다. 또한 경남적색교원노조는 조선방직 파업 등 노동 운동을 지원하고, 부산 지역의 중등학교 내에 존재하는 독서회와 같은 비밀 결사를 지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33년 10월 4일 조직이 발각되면서 신영갑은 1년 6개월 동안 부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경남적색교원노조 사건은 1930년대 전반기 남부 지역 최대의 조선공산당 재건 사건이었던 것이다.
1934년 가출옥한 신영갑은 일본 경찰의 감시와 회유를 견디기 어려워, 1936년경 일본으로 밀항하였다. 일본에서 1년여 동안 토목 잡역부로 일하기도 하고, 후쿠시마 인견 염색 공장[福島人絹染色工場] 등에서 노동자로 생활하던 중 또다시 발각되어 고향으로 소환되었다. 1938년 신영갑은 이번에는 중국 동북으로 갔다. 당시 만주국은 입적하기만 하면 전력을 묻지 않았고, 또한 다수의 서당을 공립학교로 개편하고 있었기 때문에 취직이 쉬웠다. 중국 봉천성 해성현 대석교(大石橋)[영구(榮口) 근처] 국민우급학교에서 신영갑은 교장으로 임명되어 1944년까지 재직하였다.
2. 해방 후 활동
1944년 말 일제의 패전을 예상한 신영갑은 1945년 8월 초 창녕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1945년 8·15 해방 직후인 10월 중순경 고향인 길곡면에서 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이 되었으며, 치안대도 조직하였다. 같은 해 11월 무렵 신영갑은 부산으로 와서 영도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이때 정식으로 조선공산당에 입당하고 영도초등학교의 교내 책임자가 되었다. 동시에 그는 조선공산당 부산시당의 영도구 선전 책임자가 되어 교양 강좌를 실시하고 선전 벽보를 살포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1946년 9월 총파업이 일어나자 신영갑은 학교에서 수업을 거부하고 숙직실에서 삐라를 만드는 작업을 진행하는 도중에 체포령이 내려져 도피하였다. 이후 학교로 돌아가지 못하고 조선공산당 사업에 몰두하는 한편, 1949년 조선노동조합 부산지방평의회[약칭 부평], 조선노동조합 경남지방평의회[약칭 도평]의 조직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하지만 조직이 와해되면서 신영갑은 6월경에 체포되어 구금되었다가 1950년 정월에 석방되었다.
이후 신영갑은 1956년 진보당에 입당하는 이외에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은 채 1950년대를 보냈다. 1960년 영도구 동삼동에서 『국제 신보』의 보급소를 운영하던 신영갑은 4·19 혁명이 일어나자 혁신 정계의 구심으로 떠오른 사회대중당 경상남도 도당에 입당하여 상임위원으로 조직위원을 역임하였다. 하지만 7·29 총선을 치르는 과정에서 사회대중당에 실망한 신영갑은 총선 후 김용겸·김진한 등과 함께 새로이 사회당을 조직하는 일을 주도하였다.
1960년 12월 7일 사회당 경상남도 도당결성준비위원회에서 그는 조직위원회 차장 겸 상임위원으로 참여하였다. 한편, 신영갑은 1961년 4월 18일 사회당 경상남도당, 경남노인회, 민주민족청년동맹 경남맹부를 기반으로 민족자주통일 경남협의회를 결성하는 과정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하지만 4·19 혁명 시기의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그는 1961년 5·16 군사 정변 이후 검거되어 징역 10년을 구형받고, 5개월여 수감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이후 그는 부산에서 거주하다가 1990년대 말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