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53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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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用謙 |
영어음역 | Gim Yonggyeom |
분야 |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서구 부민동 2가 10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종세 |
[정의]
부산 출신의 변호사이자 혁신 정치인.
[활동 사항]
김용겸(金用謙)은 1922년 부산광역시 서구 부민동 2가 10번지에서 태어났다. 1935년 서울 혜화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39년 보통 문관 시험에 합격하여 조선총독부 세무관리양성소[현 관세국경관리연수원]에서 1년간 교육을 받은 후 인천세무서 직세과 개인세 계속(係屬)으로 약 1년간 근무하다가 사임하였다. 이후 1943년 조선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고 서울에서 강병순 변호사의 지도 아래 변호사 시보 과정을 마치고 약 2년간 서울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운영하였다. 이후 1946년 9월경 부산으로 이전하여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다.
김용겸은 1947년 11월부터 1949년 4월까지 안재홍(安在鴻)이 창당한 민주독립당의 경남도당 선전부장으로, 1948년 4월부터 1950년 5월까지 김규식(金奎植)이 조직한 민족자주연맹의 경남도맹 선전국장으로, 1949년 5월부터 1950년 6월까지 조소앙(趙素昻)이 창당한 사회당의 경상남도당 부위원장으로 재임하였다. 이런 활동으로 인해 김용겸은 1950년 1월 상순경부터 말일경까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경남경찰국에 구속되었다가 부산지방검찰청에서 무혐의로 불기소 처분을 받기도 했으며, 1950년 7월 초부터 10월초까지 약 3개월간 예비 검속되어 부산형무소에 다시 수감되는 등 정치적 수난을 당하기도 하였다.
1958년 5월 2일에 김용겸은 부산광역시 서구 을구에서 제4대 민의원에 무소속으로 입후보하여 낙선하였다. 4·19 혁명 이후 김용겸은 혁신 정치 노선에 공명하여 1960년 5월 25일 ‘사회대중당 경남도당 결성주비위원회’를 결성하여 총무위원, 간사장으로 활동하고 7·29 총선 당시 부산광역시 서구 을구에서 제5대 민의원에 사회대중당 소속으로 입후보하여 낙선하였다.
총선 이후 혁신 정당이 분화하는 과정에서 김용겸은 가장 진보적인 분자들이 결집한 사회당의 창당에 참여하였다. 이에 1960년 11월 27일 서울에서 ‘사회당 준비위원회’가 결성되자, 12월 7일 ‘사회당 경남도당 결성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위원장이 되었다. 1961년 3월 16일 김용겸은 ‘반민주 악법 반대 경남공동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지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사회당 경상남도당은 경남노인회 및 민주민족청년동맹 부산·경남맹부와 함께 1961년 4월 18일 민족자주통일 경남협의회[약칭 민자통 경남협의회]를 결성하는 중심축을 형성하였다. 그 결과 김용겸은 민족자주통일 경남협의회 의장단 일원으로 피선되어 활약하였다. 김용겸은 사회당 경상남도당 결성준비위원회와 민족자주통일 경남협의회를 통해 한미 경제 협정 반대 투쟁, 2대 악법 반대 투쟁, 한국교원노조연합회 합법화 투쟁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한편으로 김용겸은 남북 협상 통일론을 지지하고 이에 따른 남북 학생 회담을 성원하는 등 통일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하지만 이런 활동으로 인해 김용겸은 1961년 5·16 군사 정변 이후 정치적 박해를 받았다. 그는 5월 19일 경상남도 사회당 사건으로 구속되어, 12월 7일 1심에서 징역 12년의 판결을 받고 상소했으나 기각되어 1962년 2월 2일 형이 확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