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43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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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相昕 |
영어음역 | Yi Sangheun |
이칭/별칭 | 명초(明初),동화(東華)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로94번길 36-6[수안동 510-1]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김동철 |
[정의]
근대 동래 지역에서 활동한 동래부 상급 향리 출신의 교육자이자 지역 유지.
[활동 사항]
이상흔(李相昕)은 본관이 영천(永川)이고, 자는 명초(明初)·호는 동화(東華)이다. 1847년(헌종 13) 11월 16일 동래에서 태어난 동래 토박이다. 진사 출신인 해산(海山) 강필문(姜必文)[1809~1876]이 세운 서당에서 공부를 하였다. 스승 강필문이 세상을 뜬 뒤에 스승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66명으로 구성된 판향계(瓣香稧) 조직을 주도하여, 매년 9월 10일 묘 앞에서 제사를 지냈다. 이상흔이 거처한 동화 초당(東華草堂)에서 시회(詩會) 등 모임이 자주 열렸다. 특히 지역의 명사인 춘곡 염휘, 해창 김병훈(金秉勳), 지전 이광욱(李光昱), 추호 박필채(朴苾彩) 등과 시회를 갖는 등 교류가 많았다.
1886년(고종 23) 9월 동래기영회에 가입하였다. 1897년(고종 34)에는 독립협회에 보조금 2원을 내었다. 1906년 10월 대한자강회 동래지회 회장이 되었다. 대한자강회 동래지회 설립 개회식 축사 내용이 『대한 자강회 월보』 4호[1906년 10월]에 수록되어 있다. 삼락학교 설립과 관련한 ‘동래부 수면 노소 신사 총회’에 수석 회원 104명 중 한 명으로 참석하였다.
1907년 11월 설립된 동명학교의 경비를 마련하기 위한 방안으로 장시 우전세(場市牛廛稅)와 수면(首面) 소재 삼림 제언을 학교에 부속하는 청원서를 이상흔을 비롯하여 가선 송상종(宋商宗), 박필채 등 13명의 연명으로 올렸다. 1909년 3월에는 동래기영회 소유 논과 돈을 동명학교 기본 재산 및 적립금으로 출자한다는 증명서를 동래기영회장 송상종, 회원 이상흔 등 회원 8명이 연명으로 작성하였다.
1912년 5월 27일 사립 동래 동명학교 설립자를 동래기영회 대표 이상흔으로 변경하는 것을 조선총독부가 6월 22일 인가하였다. 이상흔은 이때부터 사망할 때까지 사립 동래 동명학교 설립자이자 동래기영회 대표로 활동하였다. 동명학교는 설립자인 이상흔과 학교장의 이원 체제로 학교를 운영하였다. 1915년 6월 동래에서 사망하였다.
이상흔 별세 후 학교장 박규석이 설립자 임시 대리를 잠시 맡다가, 1915년 12월 이상흔에서 정도용으로 변경하는 인가원을 제출하여, 1916년 2월 조선총독부가 인가하였다. 『대한 자강회 월보』 4호[1906]에서는 동래부의 노성인(老成人) 가운데 3명의 명사로 이상흔·윤철병·이광욱을 들면서, 그 덕망과 지식으로 인근 고을에까지 명예가 알려진 지 오래되었다고 이상흔을 높이 평가하였다.
[상훈과 추모]
박필채의 『추호 유고(秋湖遺稿)』에는 이상흔의 회갑을 축하하는 2편의 시와 그가 별세한 후 지은 2편의 제문이 수록되어 있다. 『폭도에 관한 편책』[1907] ‘경상남도 양반 유생 기로 수상자 대장’에 이름이 올라 있다. 1916년 3월 13일 동명학교 교정에 교우회(校友會)가 고 설립자 대표 이상흔 공적 기념비(故設立者代表李相昕功績紀念碑)를 세웠다. 고 설립자 대표 이상흔 공적 기념비는 현재 부산광역시 동래구 충렬대로 285번길 22[칠산동 360번지] 동래고등학교 교정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