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42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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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東槎錄 |
영어음역 | Dongsarok |
영어의미역 | Travelogue of Tsusima Island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엄경흠 |
[정의]
1811년 3월 부산에서 출발한 마지막 대일 통신 사행을 기록한 책.
[개설]
『동사록(東槎錄)』은 1811년(순조 11) 대일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정사(正使) 김이교(金履喬) 일행의 기록이다. 그들은 1810년 12월 12일에 사신으로 임명을 받고, 1811년 2월 12일에 서울을 출발하였다. 3월 1일에는 동래(東萊)에 도착하고, 부산에서 여러 절차를 거친 다음 윤3월 29일에 대마도(對馬島) 후츄[府中]에 도착하였다. 4월 14일에는 일본의 정사와 부사가 도착하여 22일에 국서를 교환하고 7월 3일 부산으로 돌아왔다가, 7월 11일 서울로 떠났다.
『동사록』이 다른 일반적인 일본 왕환 기록과 다른 점은 대마도까지 가서 그곳에서 일본 정부의 접반사와 국서를 교환하였다는 것이다. 이전에 대마도에서 국교를 논한 경우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마도까지의 왕환에 대해 이와 같이 상세하게 기록된 문헌은 흔하다고 할 수 없다.
[저자]
저자인 유상필(柳相弼)[1782~?]은 조선 후기의 무관으로,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자는 사익(士翼)이다. 아버지는 방어사 유달원(柳達源)이다. 음서(蔭敍)로 기용되어 여러 무관직을 역임하였다. 개천 군수로 부임되었을 때 1811년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일어나자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보상을 받은 바 있다. 그러나 다른 죄로 인하여 더 승진하지 못하고 그대로 머물러 있다가, 다시 선치에 힘써 승진하여 1826년에 황해도 병마사가 되었다.
1833년에는 양주 목사를 지내고 이듬해 우포도대장을 거쳐, 1835년(헌종 1) 총융사가 되었다. 1844년 다시 우포도대장을 역임하고 이듬해 다시 총융사가 되었으며, 1850년(철종 1)에 훈련대장이 되었다. 1856년 형조 판서가 되었고, 이듬해 배왕 대장(陪往大將)이 되었다. 무예에 매우 뛰어나서 당시에 ‘가장비(假張飛)’라고 불렸다. 시호는 무숙(武肅)이다.
[편찬/간행 경위]
『동사록』은 통신 사행의 일공(日供)으로 수행했던 유상필이 기록한 것으로, 통신사 사행원들이 남긴 일기를 1748년(영조 24) 통신사 정사인 홍계희(洪啓禧)가 수집하여 『해행총재(海行摠載)』라고 이름 붙였고, 이후에도 유상필의 『동사록』 등이 계속 수집되었다. 『해행총재』가 활자로 간행된 것은 1914~1916년 조선고서간행회에서 영인한 『조선 군서 대계(朝鮮群書大系)』부터이다.
『해행총재』는 이 책의 속속(續續)편에 『해동 명신록(海東名臣錄)』·『동문선(東文選)』 등과 함께 제3집에서 제6집까지 4책으로 수록되어 있다. 민족문화추진회에서 이를 저본으로 하여 1974~1979년에 『국역 해행총재』 12권을 발간하였는데, 『동사록』은 제10권에 있다.
[형태/서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해행총재』 속에 수록된 『동사록』은 사주 단변(四周單邊) 반곽(半郭) 21.5×15.7㎝, 10행 28자, 주쌍행(注雙行), 상 이엽화문 어미(上二葉花紋魚尾) 27.8×19.2㎝의 필사본 1책으로 되어 있다.
[구성/내용]
『동사록』에 수록된 내용 가운데 동래에서의 기록을 대략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3월 1일 큰 바람이 동래에 이르자 본부에 체류하는 두 사신이 정원루(靖遠樓)에 올라 종일 음악 연주를 들었다. 3일 두 사신이 출발하여 부산(釜山)으로 20리를 내려가니 본관 등이 환영하였다. 두 사신은 물품과 선박 등을 점검하였다. 5일 국서(國書)를 대조하여 살피고 장계(狀啓)하였다. 9일 일행을 영가대(永嘉臺)에 나오게 하여 서계(誓戒)를 받았다.
윤3월 12일 진시(辰時)에 배를 출발시켜 다음날 오시(午時)에 대마도 좌수포(佐須浦)에 배를 대었다. 7월 3일에는 부산포 선창에 정박하였고 11일 이른 아침에 사신 일행이 길을 나서 상경하였다. 이상의 내용은 간략하게 추려서 적은 것으로 물품이나 상황의 전개는 더욱 복잡하다. 부산은 일본과의 외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지리적 위치를 차지하였으므로 『동사록』 또한 부산에서의 기록을 상세히 적고 있다.
『동사록』에는 이뿐만 아니라 임무 및 인원의 구성에 대해 성명까지 구체적으로 적고 있다. 그리고 우리 왕의 국서, 대마주 태수에게 보내는 글, 일본 측 정·부사에게 보내는 글, 일본의 국서, 서계(書契), 대마 도주가 보내는 별서계, 공명첩(公命帖), 대마 도주에게 답하는 별서계, 대마 도주와 작별하는 글 등이 실려 있다. 또한 공적인 예단(禮單) 물목(物目)인 인삼 33근 등이 상세히 적혀 있고, 일본 측에서 보내온 물건들과 이의 배분에 대한 내용도 덧붙여 놓아 모든 일본 내왕의 기록이 완전하게 갖춰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의의와 평가]
『동사록』은 사신의 임명에서부터 서울로 돌아가기까지 사행 기간 동안의 일정을 완전하게 기록하고 있어 대일 관계사 연구에 대단히 중요한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