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8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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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絶影島倭館 |
영어의미역 | Provincial Waegwan in Jeollyeong Island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관부(전통 시대) |
지역 | 부산광역시 영도구 대평동 2가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양흥숙 |
[정의]
조선 후기 부산광역시 영도구 대평동 2가에 있던 왜관.
[개설]
절영도 왜관(絶影島倭館)은 1601년(선조 34)경 설치되어 1607년(선조 40) 두모포로 왜관이 이전될 때까지 사용된 일본 사절의 숙소이자 조일 무역이 행해진 곳이었다. 임진왜란 후 조선과 일본 사이의 관계 회복 노력은 일본이 사절을 먼저 파견하면서 시작되었다. 1600년(선조 33) 8월 일본과의 무역을 재개하자는 의견이 조선 조정에서도 개진되었다. 절영도 왜관에서의 개시(開市)[조선과 일본 상인 사이의 무역] 문제는 1603년(선조 36)에 본격화되어 이해에 승인되었다. 1607년 두모포 왜관이 조성되면서 그 기능을 잃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절영도 왜관이 언제 어떤 목적으로 세워졌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그러므로 『통문관지(通文館志)』에는 “절영도에 왜관이 있었다고 하나 설치와 철폐에 관한 내용을 찾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1601년 6월 일본인 10명이 일본의 강화 문서(講和文書)를 소지하고, 조선 피로인(被擄人) 250명을 데리고 와서 부산에 체류한 것으로 보아 이때부터 사절의 접대 공간이 있었다고 여겨진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부산에 있던 대부분의 명군(明軍)이 철수한 상태이었지만, 부산진성(釜山鎭城)에는 잔류하는 명군과 조선군이 있었다.
이에 일본 사절이 왔을 때 조선 전기 그들이 머물던 부산포 왜관 터[부산진성 경내]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절영도에 머물렀던 것이다. 임진왜란 후 단절된 국교를 회복하기 위해 조선에 온 일본 사절의 접대 공간 및 체류 공간이 필요하기도 하였지만, 1600년 8월 양국의 무역 재개에 대한 의견이 나올 정도로 무역의 필요성도 높아졌다. 이러한 기능을 수행한 공간이 절영도 왜관이었다.
[관련 기록]
조선 후기 절영도 왜관에 대해 알려 주는 자료로는 『선조실록(宣祖實錄)』, 18세기에 쓰인 대외 관계(對外關係) 자료집인 『통문관지』, 1607년 회답 겸 쇄환사(回答兼刷還使)의 사행록(使行錄)인 『해사록(海槎錄)』 등이 있다.
[변천]
절영도 왜관에 대한 기록이 문헌에 많이 나타나는 시기는 1606년에서 1607년이다. 이 시기는 회답 겸 쇄환사가 파견되는 때이므로 일본으로 출발하기 위해 사절단이 부산에 머물면서 절영도 왜관에 있는 일본 사절을 만나기도 하였다. 그런데 대일 외교의 중요성이 대두된 이 시기에 또 등장하는 것이 바로 절영도 왜관 건물이 많이 훼손되어 일본 사절들이 머물기 어렵다는 호소이다.
회답 겸 쇄환사의 부사(副使)로 임명된 경섬(慶暹)의 사행 기록인 『해사록』에는 “배를 타고 절영도 왜관 앞을 지나다가 왜관에 머무르던 일본 사절 귤지정(橘智正)을 불러 보았다”, “왜인 귤지정이 절영도에 왔는데 옛 관사(館舍)는 훼철되고 초가집은 보잘것없으며, 지공(支供)[조선에서 일본 사절의 체재에 도움이 되도록 제공하는 식품 및 물품 등]도 좋지 않아 크게 성을 내고 [일본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등의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왜관의 건물이 낡아 일본 사절에게 불편함을 끼치게 되자 새 왜관 조성의 요청이 대두되었다. 이에 절영도란 섬이 아닌 육지에 왜관을 조성하게 되었다. 이 새 왜관이 1607년 후반에 완공된 두모포 왜관이며, 이로써 절영도 왜관은 완전히 폐쇄되었다.
[의의와 평가]
절영도 왜관의 존속 기간은 7년에 이르는 짧은 기간이다. 그러므로 임시 왜관, 가왜관 등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 단절된 조일 관계를 회복하는 데 중요한 외교 공간이었다. 또한 국교 수립 전에 이미 무역이 이루어진 장소로서, 조선과 일본 상인이 만나 교류하던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