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7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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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福田增兵衛 |
영어음역 | Hukuda Zoubee|Hukuda Masubee |
이칭/별칭 | 복전증병위(福田增兵衛)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중구 동광동 3가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전성현 |
[정의]
근대 부산 지역에서 활동한 일본인 경제인.
[가계]
후쿠다 소베[福田增兵衛]는 1844년(헌종 10) 일본 쓰시마 상현군 주자촌[對馬島 上縣郡 舟子村]에서 사무라이 무본등좌위문(武本藤左衛門)의 아들로 출생하여 이즈하라(嚴原)의 상인 후쿠다 아무개[福田某]에게 양자로 입양되었다. 자녀로 양자 복전유조(福田有造)가 있으며, 목포에 상점을 개시하고 무역상을 물려받았다.
[활동 사항]
후쿠다 소베는 어릴 때부터 쓰시마[對馬島]의 이즈하라[嚴原町]로 나와 상점에서 장사를 배우면서 야간 학숙을 다녔으며, 어느 정도 돈을 모아 어선을 구입하여 어업에 종사하며 성장하였다. 후쿠다 가문의 양자가 된 이후 이즈하라와 나가사키[長崎] 간 무역을 개시하였고, 이어서 시모노세키[下關], 고베[神戶], 오사카[大阪]까지 항해를 확대하며 사업을 확장하였다.
1871년(고종 8) 조슈[長州]의 속옥다조(粟屋多助)가 목호효윤(木戶孝允) 참의의 명령을 받아 쓰시마에 왔을 때 후쿠다 소베는 자신 소유의 선박 긴피라마루[金比羅丸]를 이용하여 부산으로 물품을 수송하였고, 별도의 작은 배를 출범시켜 부산으로 처음 건너왔다. 1873년(고종 10) 다시 조선으로 건너와 범선을 이용하여 무역업을 시작한 후쿠다 소베는 해산물, 우피, 약재 등의 판매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판로가 좁고 조선 정부의 외국 제품 사용 금지로 영업이 지지부진하자, 당시 고가였던 포해태(布海苔)[청각채]를 매점하여 오사카에 판매함으로써 자본을 축적, 성공의 기초를 닦았다.
이후 후쿠다 소베는 부산에 영주하며 무역업에 종사하는 동시에 수출품 및 한인 상관습의 개선에 힘썼다. 또한 토지와 가옥을 매입하고, 서정(西町)에 술과 간장 등을 양조하는 주조업을 개시하였으며, 토목 청부업에도 관여하였다. 당시 ‘향양(向陽)·부구천(富久泉)·대청(大廳)’이라는 이름의 청주를 제조하여 판매한 것으로 유명하다. 청일 전쟁 때에는 어용상인으로 일본군의 식량을 운반하여 이익을 남겼다. 특히 성장의 가장 큰 요인은 역시 토지의 매수였기에 일제의 조선 침략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때문에 부산의 일본인 중 하자마 후사타로[迫間房太郞], 오이케 츄스케[大池忠助]와 함께 ‘부산의 3대 성공자’로 불렸다.
개항 이전부터 부산에 건너와 자리를 잡았던 후쿠다 소베는 일본인 상인들의 이익집단인 부산상법회의소의 설립에도 관여했으며, 이후 부산상업회의소 의원, 부산거류민단 의원 등을 역임하며 일본인들의 정착과 세력 확장에 힘썼다. 또한 1907년(순종 1)부터 부산번영회 회원으로도 활동하였다. 대청산을 개척하여 향양원이라는 공원과 같은 별장을 건설하고 조선으로 오가가는 일본인 관료는 물론 부산에 오는 일본인들의 편의를 제공하면서 노후를 보냈다.
[상훈과 추모]
1881년(고종 18)에 남수포상(藍綬褒賞)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