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5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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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池忠助 |
영어음역 | Oyke Chyuske |
이칭/별칭 | 대지충조(大池忠助)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중구 광복동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전성현 |
[정의]
근대 부산 지역에서 활동한 일본인 대자본가.
[활동 사항]
오이케 츄스케[大池忠助]는 1856년 일본[日本] 나가사키 현 하현군 엄원정 궁곡[長崎縣 下縣郡 嚴原町 宮谷] 54번지에서 오이케 쇼베이[大池庄兵衛]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3세 때 숙부인 고오리 이베에[郡伊兵衛]의 천금단본포(千金丹本鋪)에 견습 점원으로 들어가 일하면서 사숙(私塾)에 통학하였다. 20세 되던 1875년 2월 28일 오이케 츄스케는 당시 시가 250엔 정도의 상품을 가지고 부산에 들어왔는데, 그가 한국으로 들어와 부산에서 성장한 데에는 친형 고오리 긴사부로[郡金三郞]의 영향이 컸다.
고오리 긴사부로는 일찍 숙부의 양자로 들어가 숙부가 운영하는 상점을 경영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왜관과의 무역을 위해 부산과의 왕래도 잦았는데, 이로 말미암아 오이케 츄스케의 부산 도항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1875년(고종 12) 부산감리서의 야마시로[山城]라는 자가 ‘보천사(普天社)’라고 하는 조선어 공부를 목적으로 하는 야학교를 설립하였다. 이에 고오리 긴사부로는 동생 오이케 츄스케에게 여기에 들어가 공부할 것을 권유하였고, 오이케 츄스케는 당시 부산에 함께 들어온 21명의 일본인 청년과 함께 조선어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오이케 츄스케는 일본에서 들여온 상품을 근간으로 조선의 해초를 모아 일본으로 보내는 사업을 시작하였다. 고오리 긴사부로는 1877년(고종 14) 부산으로 도항하여 상점을 열고 무역과 수화물 도매를 시작했는데, 업무가 번성하자 1880년(고종 17) 이를 동생 오이케 츄스케에게 물려주고 당시 개항이 되지 않았던 인천으로 진출하였다. 오이케 츄스케는 형이 물려준 상점을 오이케상점[大池商店]으로 고치고 본격적으로 영업을 시작하면서 부산의 중심적인 인물로 성장해 갔다.
부산의 개항과 함께 1878년(고종 15)부터 미쓰이 기선이 일본과 조선 간의 항해를 시작하자, 오이케 츄스케는 부산 대리점을 인수하여 무역업에 뛰어들었고 이로 말미암아 오이케상점은 고베[神戶], 시모노세키[下關], 나가사키[長崎] 등 일본 본국에도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이후 부산에 관여하지 않는 기업이 없을 정도로 수많은 기업을 설립 또는 투자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다른 지역 기업에도 관여하는 등 자본을 확대해 나갔다. 더불어 많은 동업 조합을 조직하여 이끌었는데, 대표적인 회사로 부산의 부산수산주식회사, 조선와사전기주식회사 등이 있으며, 부산 외 타 지역 기업으로는 조선우선주식회사, 경성주식현물시장, 인천미두취인소 등이다. 대표적인 동업 조합은 곡물수출상조합, 부산곡물상조합, 부산해산물조합 등이며, 모두 조합장을 역임하였다.
경제적 성공과 함께 사회 활동도 활발해져서, 오이케 츄스케는 1881년부터 부산거류지회[약칭 민단]와 부산상업회의소의 의원으로 선출되기 시작하였다. 1914년 민단제가 해체될 때는 민단장으로, 1916년 조선인과 일본인 합동의 부산상업회의소가 성립될 때에는 회두로 활약하면서 일본인 사회에서 ‘부산의 오이케[大池]’로 위상을 정립하였다. 그리고 1930년 2월 대구에서 사망할 때까지 민간의 ‘공직’라고 할 수 있는 상업 회의소, 부 협의회, 학교 조합 3단체의 중심인물로서 활약하였다. 즉, 1909년부터 1926년까지 줄곧 부산상업회의소의 회두, 부회두, 평의원 등을 역임하며 부산의 일본인 경제를 위해 노력하였으며, 1914년 부제의 실시로 설립된 부산부 협의회의 의원으로 부산의 부정에도 적극 개입하여 일본인 사회의 이익을 위해 노력하였고, 1920년에는 경상남도 평의회 회원도 역임하였다.
또한 오이케 츄스케는 부산에서 조직된 각종 단체와 협찬회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하며 부산 일본인 사회의 원로로서 활약하였다. 1907년 부산번영회가 조직되자 회장에 선임되었으며, 1914년 부산에서 개최된 제1호 경상남도물산공진회 부산협찬회 회장을 맡았고, 1923년 조선수산공진회협찬회 고문을 맡기도 하였다. 1925년에는 경상남도 도청 이전 실행을 위한 협찬회를 조직하고 회장을 맡으면서 관사 부지로 토지를 기부하는 등 도청 이전을 위해 적극 노력하였다. 일본 본국과 일본인들을 위한 구휼 자선 사업에도 관여하여 1923년 9월 일본 관동 대지진의 이재자를 구호하기 위해 백미 100석[가격 4,000엔]을 내놓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오이케 츄스케의 활동은 부산 지역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일본 본국으로까지 확대되었다. 1915년 나가사키[長崎] 현의 대의사(代議士)로 선출되어 제국 의회에서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 사회를 위한 법안 제정에 적극 개입하였다. 물론 선거법 위반으로 1년 정도의 기간만 대의사로서 활동하였지만, 이를 통해 오이케 츄스케는 ‘부산의 오이케[大池]’가 아니라 ‘조선의 오이케[大池]’로 표상되며 조선의 대표적인 성공한 식민자로 자리매김하였다.
[상훈과 추모]
1906년 러일 전쟁 후 전역의 훈공으로 훈6등 서보장(瑞寶章)을 받았고, 1919년 2월 공공사업에 진력한 공을 인정받아 남수보장(藍綬寶章)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