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339 |
---|---|
한자 | 迫間房太郞 |
영어음역 | Hajama Husataro |
이칭/별칭 | 박간방태랑(迫間房太郞)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금강로123번길 12[온천1동 126-1]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차철욱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지역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일본인 경제인이자 정치인.
[가계]
하자마 후사타로[迫間房太郞]는 1860년 10월 20일 일본 화가산현 나하군 지전촌[和歌山縣 那賀郡 池田村]에서 박간가사랑(迫間嘉四郞)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활동 사항]
하자마 후사타로는 1878년 오사카에 위치한 오백정장평상점(五百井長平商店)에 입사하였다. 1879년 상점이 파산하자 재건의 사명을 띠고 1880년 5월 지배인으로 부산에 왔다. 1890년 무렵 미두, 우피, 석유, 금속, 면사포 등의 무역으로 오백정장평상점을 조선의 대표적인 일본인 무역 회사로 키워 냈다.
1904년 하자마 후사타로는 회사를 정곡의삼랑(井谷義三郞)에게 맡기고 독립하여 박간상점(迫間商店)을 경영하였다. 박간상점은 주로 무역과 농사 경영 및 토지 사업 등에 투자하였는데, 1888년 일본 규슈에서 우량 벼 품종을 수입해 마산 등지에 보급하여 조선 최초의 미곡 품종 개량을 시도하였고, 1905년경부터 부산 시가지 부근의 황폐한 임야에 약 500만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
하자마 후사타로는 부산의 일본인 거류지 지역과 초량, 영도 및 경상남도, 전라남도, 전라북도 지역에서 많은 토지를 매입하였다. 1928년 김해 평야에 노전(蘆田) 1000여 정보를 개간하여 논 700정보, 생산미 2만 석을 거두고, 1,200호를 소작 이민시켰다. 같은 해 경상남도 창원군 동면과 김해군 진영면에 걸쳐 있는 농장을 매입하였다. 진영 농장으로 불렸던 이곳에서 하자마 후사타로는 조선인 소작농과 갈등을 빚었고, 결국 1931년 1월부터 1932년 2월까지 대규모 소작 쟁의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부산에서도 토지와 가옥 매입, 차가업(借家業)[집을 빌려주는 영업]으로 조선인과 갈등을 빚었다.
그러나 식민자로서의 국책 수행을 위해 일면으로는 조선인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한 측면이 있었다. 예를 들어, 조선인인 정기두와 문상우를 자신의 점원으로 고용하였으며, 부산의 대표적 조선인 은행인 구포은행[경남은행]과 동래은행에 주주 및 간부로 참여하였다. 또 조선인 구제를 위한 부업 장려, 착색의 착용 등 다양한 사회 운동을 지원하였으며, 일본어판 『부산 일보』의 조선어판 발행을 지지하였다.
1884년 하자마 후사타로는 부산일본인상업회의소 의원에 당선된 이래 사망할 때까지 의원[1919~1921년까지 제외], 회두[1908~1909년, 1915~1916년], 특별의원[1922~1943년]을 역임하였다. 또한 1929년부터는 부산번영회 회장을 겸하였다. 공공 단체의 경력을 보면 부산거류지회 의원[1884~1914년], 부협의회 회원[1914~1923년], 부산부회 의원 및 부의장[1939~1942년], 경남도평의원[1920~1924년, 1930~1937년], 경남도회 부의장[1933~1937년]을 지냈다. 즉, 1884년 부산거류지회 의원에 당선된 후 1925년부터 1929년의 5년간을 제외한 전 기간에 부산항과 부산부의 지방 행정에 참여하였던 것이다.
이 외에도 부산수산주식회사[1889년], 부산창고주식회사[1896년], 부산곡물수출조합[1900년]과 곡물상조합[1900년], 부산전등주식회사[1901년], 부산잔교주식회사[1903년], 조선와사전기주식회사[1911년], 구포은행[1912년], 부산공동창고주식회사[1913년], 조선부동산주식회사[1935년]을 각각 발기 설립하였다. 조선저축은행, 조선제련주식회사, 경춘철도주식회사, 남선창고전기주식회사, 조선흥업주식회사, 조선임업주식회사 등에서는 설립 위원 혹은 중역으로 활동하였다.
하자마 후사타로 본인이 직접 경영한 회사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부산잔교주식회사 사장[1903~1917년], 부산공동창고주식회사 사장[1913~1933년]을 지낸 것이 대표적이다. 조선인 회사인 구포은행에서 상담역과 취체역[1912~1926]을, 동래은행에서는 주주를 지냈다. 하자마 후사타로는 1940년부터 신경통이 악화되자 시즈오카 현 열해시[靜岡縣 熱海市] 별장에서 요양하다 1942년 8월 23일 사망하였다. 부산부회의 만장일치로 부산부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관련 유적]
부산 지역에는 하자마 후사타로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동래 온천장에 남아 있는 동래 별장이 대표적이며, 얼마 전 부산광역시 중구에 위치해 지명이 변경된 ‘박간산’도 그 대표적인 흔적이요 유적이다.
[묘소]
『하자마 후사타로 옹 연보(迫間房太郞翁年譜)』에 아미산에 매장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1899년 러시아가 삼국 간섭에 의거해 일본을 압박할 목적으로 진해, 마산 방면으로 진출할 계획을 꾸미자 하자마 후사타로는 사전에 한국주차공사의 밀명을 받아 마산 지역의 토지를 매수해 러시아의 남진을 좌절시켰다. 러일전쟁 후 그 공을 인정받아 훈6등 서보장(瑞寶章)을 받았다. 1935년 경상남도로부터 시정 공로자로 은배를 받았고, 1938년에는 육군 기념일을 맞이하여 표창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