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7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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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開港期 |
영어의미역 | Harbor-opening Period |
분야 | 역사/근현대,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홍순권 |
[정의]
1876~1910년 시기 부산 지역의 역사.
[개항과 부산]
1876년 8월 조일 수호 조규[강화도 조약]에 의해 개항된 이후 1910년 8월 일제에 의해 강제 병합될 때까지 외국과의 통상을 위해 개항장과 개시장이 설치되었다. 개항기 전국의 개항장과 개시장의 설치 시기를 살펴보면 아래의 표와 같다.
@@GC04203753_01_1876년 이후 전국 개항장·개시장의 개설 시기
개항기는 아직도 봉건 체제였던 조선 사회가 근대 무역을 통해 세계 자본주의와 교류하면서 근대 사회로 전환을 모색해 가던 시기이다. 동시에 제국주의 서구 열강과 청 및 일본과 같은 외세에 의해 경제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치 군사적으로 주권을 위협받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부산이 성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보다 일본과의 교역이었다. 부산항의 개항 이후 1880년 5월 원산항이 개항할 때까지 4년간은 부산항이 외국과의 무역을 독차지하였다. 물론 이 때의 주요 무역 상대국은 일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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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청일 전쟁에서 청이 패배하고 일본이 승리하자, 일본은 조선 무역의 주도권을 확실하게 장악하였다. 이후 부산은 일본과의 교역량이 꾸준히 늘어나면서 국내 최대의 무역항으로 성장하였다. 이 시기에 일본은 종전의 중계 무역에서 탈피하여 일본제 면제품을 부산항을 통해 수출함으로써 조선을 점차 상품 판매 시장으로 장악해 들어갔다. 이러한 추세는 일본이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늑약(乙巳勒約) 이후 더욱 강화되어 조선 무역은 점차 일본의 식민지 구조 속으로 편입되어 갔다.
[부산의 형성]
개항 이후 일본과의 무역량이 해마다 증가하면서 부산항의 항만 시설도 크게 확충되었다. 1887년에는 청이 조선 정부의 허가를 받아 기술자를 초빙하여 용미산 앞 갯벌의 매립 공사를 시작하여 1894년 4월에 완공을 보았으며, 1899년 10월에는 매축한 자리에 해관 잔교(海關棧橋)[잔교는 배를 접안시키기 위해 물가에 만들어진 계선 시설]와 보세 창고가 세워졌다.
개항기 대규모 매축 사업은 일본인 회사인 부산매축회사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부산매축회사는 오늘의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동 옛 부산역과 부산우체국, 세관 부지, 중앙동의 중앙로 일대를 매립하기 위해서, 대한제국 정부의 허가를 얻어 1902년 7월부터 1905년 12월까지 제1기 공사를 마치고, 1907년 4월부터 1909년 8월까지 제2기 공사를 마무리하였다. 이러한 매축 사업에 따라 1906년에는 북빈 잔교(北濱棧橋)가 설치되었다. 이처럼 부산이 국제 무역항으로 발전해 가면서 특히 일본인들의 이주가 크게 늘어났다. 그 결과 개항 당시 한적한 어촌에 불과했던 부산은 일본 거류지를 중심으로 급속히 성장하여 1914년 부제가 실시될 때는 인구 약 5만 5000여 명의 큰 도시로 발전하였다. 그 중 일본인의 인구가 약 51.3%를 차지하였다.
[상권의 재편]
개항기 부산은 일본의 조계지인 일본 거류지를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따라서 개항기 일본 상인의 부산 진출은 부산의 조선 상인에게 많은 타격을 주었다. 이들은 조선인 객주들이 지녀온 기득권이 상권 경쟁에 장애가 되자 이를 배제하기 위해서 외교적 압력을 가하는 한편 조선인 영세 상인들에 대해서는 고리대 등을 통하여 경제적으로 예속시켜 나갔다. 이러한 일본 상인의 침투와 상권 장악에 대해서 부산의 조선 상인들은 조직적 단결을 통한 상권 수호와 근대적 상회사(商會社) 설립을 통한 상권 경쟁에 나섰다. 이 때 부산의 객주와 상인들이 조직한 근대적 상회사로는 객주상회사, 기선회사와 보험회사, 남선창고 등이 있었다.
[부산항의 개항과 도시 발전의 역사적 의의]
부산항의 개항은 조선이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봉건 체제를 개혁하여 근대 사회로 전환할 수 있는 새로운 계기가 된 반면, 일본에게는 정치·경제·군사적으로 대륙 침략을 위한 교두보가 마련되었다는 양면적인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개항기 일본은 부산을 단순히 한일 교역의 무역항으로 개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대륙 진출을 위한 군사적 거점으로서의 지정학적 이점을 최대한으로 활용하였다. 그리하여 부산은 일본군의 군사 주둔지이면서, 경부선의 종점으로서 대륙 진출의 관문 구실을 하게 되었다.
개항기 부산의 도시 발전은 일본을 통한 서구 근대 문물의 유입과 확산에 큰 기여를 했으며, 이로 인해 개화 운동과 계몽 운동의 발전에도 큰 자극을 주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부산의 일본 거류지를 중심으로 범람한 일본 전통문화의 유입은 외형적 근대화와는 달리, 식민지 문화의 내재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개항기 부산을 기반으로 경제적 실력을 쌓은 재부산 일본 상인들은 전국 각 개항장과 도시로 진출하여 식민 경제의 부식과 확산에 앞장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