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7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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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梁太鎔 |
영어음역 | Yang Taeyong |
이칭/별칭 | 양대용(梁大溶),양태용(梁泰鎔)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부산광역시 북구 금곡동 654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장선화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양태용(梁太鎔)[1893~1937]은 1893년 2월 24일 부산광역시 북구 금곡동 654번지에서 태어났다. 다른 이름은 양대용(梁大溶)과 양태용(梁泰鎔)이다. 구포 장터 3·1 만세 운동은 부산과 동래의 만세 시위 소식이 전해지던 3월 중순 경성의학전문학교[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학생인 양봉근(楊奉根)이 구포로 내려와 임봉래(林鳳來)[구포면사무소 서기], 윤경(尹涇)[사립화명학교 교사], 유기호 등을 만나면서 구체화되었다. 이들을 중심으로 구포 지역 청년들은 구포 장날인 3월 29일에 만세 시위를 일으키기로 하고, 3월 27일과 28일 거사에 필요한 독립 선언서와 태극기를 밤을 새워 제작하였다.
3월 29일 거사 당일 정오를 기해 이들은 구포 시장에서 장꾼 1,000여 명과 함께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고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양태용은 태극기를 흔들며 선두에서 시위를 이끌었다. 시위 도중 김옥겸(金玉兼) 외 10명의 주도자들이 일본 경찰에 붙잡히자, 양태용 등 젊은 청년들은 대오를 정비하여 1,2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구포주재소로 돌진하였다. 청년들은 구포주재소 유리창을 파괴하고 의자와 책상 등 집기를 부수면서 구금된 인사들을 구출하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 경찰의 무차별 발포에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체포되었다. 이때 양태용은 박도백(朴道伯)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양태용은 1919년 7월 19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4월에 집행 유예 2년형을 선고 받았다. 1937년 11월 15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7년에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