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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도백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0382
한자 朴道伯
영어음역 Bak Dobaek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중앙로394번가길 62[대저1동 379]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장선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출생 시기/일시 1892년 4월 19일연표보기 -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29일 - 구포 장터 3·1 만세 운동 주도
몰년 시기/일시 1939년 5월 24일연표보기 - 박도백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6년연표보기 -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19년 3월 29일연표보기 - 구포 장터 3·1 만세 운동
출생지 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1동 379
거주|이주지 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1동 379
활동지 구포 장터 -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박도백(朴道伯)[1892~1939]은 1892년 4월 19일 김해군 대저면 출두리 379번지[현 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1동 379번지]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농업에 종사하던 박도백은 3월 29일 구포 장터 3·1 만세 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다.

구포 장터 3·1 만세 운동은 부산과 동래의 만세 시위 소식이 전해지던 3월 중순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인 양봉근(楊奉根)이 구포로 내려와 구포면사무소 서기 임봉래(林鳳來)사립화명학교 교사 윤경(尹涇) 등을 만나면서 구체화되었다. 이들을 중심으로 구포 지역 청년들은 구포 장날인 3월 29일에 만세 시위를 일으키기로 하고 거사에 필요한 독립 선언서와 태극기를 3월 27일과 28일에 제작하였다.

1919년 3월 29일 정오를 기해 태극기와 독립 선언서가 배포되고 시위가 시작되자 박도백은 시위에 참가하였다. 시위 도중에 출동한 일본 경찰에게 김옥겸(金玉兼) 외 10명의 주동자가 체포되자 박도백은 시위 군중들과 함께 구포주재소로 달려가 유리창, 의자, 책상 등을 부수며 구금되어 있는 동지들을 구출하려 하였다. 이때 일본 경찰이 무차별 발포를 자행하여, 선두에서 항의 시위를 하던 박도백은 총탄을 9발이나 맞고 체포되었다. 그럼에도 7월 19일 부산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3월을 선고 받았는데, 이 사건 관련자 가운데 윤정은(尹正殷)과 더불어 최고형이었다. 박도백은 1939년 5월 24일에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6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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