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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봉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3694
한자 林鳳來
영어음역 Im Bongrae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부산광역시 북구 화명대로 69-21[화명동 1367]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장선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경력 구포면사무소 서기
출생 시기/일시 1890년 4월 22일연표보기 -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1년 - 사립화명학교 교사로 재직
활동 시기/일시 1912년 - 구포면사무소 서기로 재직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29일 - 구포 장터 3·1 만세 운동 주도
활동 시기/일시 1919년 7월 - 징역 1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
몰년 시기/일시 1968년 2월 15일연표보기 -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68년연표보기 - 대통령 표창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건국 훈장 애족장 추서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19년 3월 29일연표보기 - 구포 장터 3·1 만세 운동
출생지 부산광역시 북구 화명동 1367
거주|이주지 부산광역시 북구 화명동 1367
활동지 사립화명학교 - 부산광역시 북구 화명동 1426-1지도보기
활동지 구포면사무소 - 부산광역시 북구
활동지 구포 장터 -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 1154 일대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임봉래(林鳳來)[1890~1968]는 1890년 4월 22일 부산광역시 북구 화명동 1367번지에서 태어났다. 1911년 사립화명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1912년 사직하고 구포면사무소 서기로 근무하였다. 1919년 당시 구포면사무소 서기로 재직하던 중 3월 29일 구포 장터 3·1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중순에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이었던 양봉근(梁奉根)임봉래를 찾아왔다. 양봉근은 일찍이 사립화명학교에서 임봉래와 친분을 맺은 바 있었다. 양봉근은 서울과 평양에서 진행된 3·1 만세 시위에 대해 알려 주고 구포 지역의 시위를 당부하였다. 이에 임봉래는 바로 다음날 윤경(尹涇)과 유기호(柳基護)를 만나 구포 지역의 3·1 만세 운동을 계획하였다. 이들은 1919년 3월 27, 28일 박영초(朴永初)·이수련(李守蓮)의 집에서 김옥겸(金玉兼)·김윤길·허정·김용이 등과 모여 3월 29일 구포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독립 선언서와 태극기를 만들었으며, 큰 태극기 하나와 대한 독립 만세라고 크게 쓴 현수막도 만들었다.

3월 29일 정오 이들은 박덕홍(朴德弘)·손진태(孫晉泰)·김장학(金章鶴)·이몽석(李夢石)·양태용(梁太溶)·김영길·정치호(鄭致浩)·권용학(權龍鶴)·안화중(安華重)·허희중(許希中) 등 청년들과 독립 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누고 장꾼 1,000여 명과 시위에 들어갔다. 일부는 시위를 위하여 시장 철시를 호소하면서 장꾼을 지휘하였고, 김윤길 등은 구포면사무소로 달려가, 민족적 양심으로 뉘우치고 동참할 것을 면장에게 촉구하기도 하였다.

김옥겸 외 11명의 주동자들이 출동한 일본 군경에 잡혀 구포주재소에 구금되자, 임봉래·윤정은(尹正殷) 등은 1,200여 명의 시위 군중을 이끌고 시위 주동자의 석방을 요구하며 구포주재소로 돌진하였다. 일본 경찰들이 시위 군중에게 무차별 발포를 자행하며 시위대를 체포할 때 임봉래도 체포되었다. 보안법 위반 협의로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68년 2월 15일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한학자였던 임봉래가 해방 이후 낙동강 하류에서 창립된 낙남시계(洛南詩契)에서 지었던 한시(漢詩)가 전해오고 있다.

[상훈과 추모]

1968년에 대통령 표창, 1990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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