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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치옥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0391
한자 許致玉
영어음역 Heo Chiok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부산광역시 북구 낙동대로1738번길 10[구포동 263-1]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장선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출생 시기/일시 1894년 10월 27일연표보기 -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29일 - 구포 장터 3·1 만세 운동 주도
활동 시기/일시 1919년 7월 19일 - 징역 1년형을 선고 받음
몰년 시기/일시 1924년 9월 6일연표보기 - 허치옥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19년 3월 29일연표보기 - 구포 장터 3·1 만세 운동
출생지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 263-1
거주|이주지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 263-1
활동지 구포 장터 -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허치옥(許致玉)[1894~1924]은 1894년 10월 27일에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 263-1번지에서 태어났다. 구포 장터 3·1 만세 운동은 부산과 동래의 만세 시위 소식이 전해지던 3월 중순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인 양봉근(楊奉根)이 구포로 내려와 임봉래(林鳳來)[구포면사무소 서기], 윤경(尹涇)[사립화명학교 교사], 유기호(柳基護) 등을 만나면서 구체화되었다. 구포의 유지들과 청년들이 거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결정하자, 이들은 구포 장날인 3월 29일로 시위 일자를 정하고, 3월 27일과 28일에 거사에 필요한 독립 선언서와 태극기를 밤새워 제작하였다.

3월 29일 거사 당일 시위 주동자들은 준비한 독립 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구포 시장에서 장꾼 1,000여 명과 함께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시위 중 김옥겸(金玉兼)을 비롯한 11명의 주동자들이 일본 경찰에 붙잡히게 되자,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1,200여 명의 시위 군중이 구포주재소로 돌진하였다. 이때 허치옥은 앞장서서 시위를 주도하다 일본 경찰의 무차별적 발포와 체포 과정에서 잡히고 말았다. 1919년 7월 19일 허치옥부산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4년 9월 6일에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0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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