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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규 순난비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3323
한자 趙英圭殉難碑
영어의미역 Stone Monument for the Sufferings of Jo Yeonggyu
이칭/별칭 조공영규 순난비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부산광역시 동래구 동래시장길 27[복천동 229-78]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정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이전 시기/일시 1742년 - 송공단으로 이전
보수|복원 시기/일시 1766년연표보기 - 송공단 동쪽 1단으로 이설
보수|복원 시기/일시 1767년 - 송공단 동쪽 1단에 존치(存置)
보수|복원 시기/일시 2005년연표보기 - 1766년과 같게 보수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1535년연표보기 - 조용규 출생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1592년 4월 15일연표보기 - 조용규 사망
관련 사항 시기/일시 1592년 - 조용규 양산 군수 부임
관련 사항 시기/일시 1667년 - 조용규 장성 모암 서원에 배향
관련 사항 시기/일시 1709년 - 조용규 동래 충렬 별사에 배향
관련 사항 시기/일시 1736년 - 조용규 동래 충렬사에 배향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72년 6월 26일 -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11호로 지정된 송공단의 부속 단비
현 소재지 송공단 -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229-78지도보기
성격 비|순난비
관련인물 조영규(趙英圭)[1535~1592]|김석일(金錫一)|권이진(權以鎭)|강필리(姜必履)
재질 화강암
크기 92㎝[높이], 29㎝[너비], 12㎝[두께]|단: 155㎝[가로], 91㎝[세로], 74㎝[높이]
소유자 부산광역시 동래구청
관리자 부산광역시 동래구청
문화재 지정번호 부산광역시 기념물

[정의]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송공단에 있는 조선 후기 조영규(趙英圭)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

[개설]

조영규[1535~1592]는 1554년(명종 9) 무과에 급제한 후 훈련원 초관(訓練院哨官), 제주 판관, 무장 현감, 영암 군수, 용천 군수, 낙안 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업무를 행함이 엄격하고 투명하였으며, 자신을 단속하여 청백(淸白)하였고, 늙어서는 더욱 독실하였다. 무장에 있을 때 아버지의 상을 당해 벼슬에서 풀려 집에 돌아가니 집에는 한 섬의 양식이 없을 정도이었고 효성도 지극하였다.

1592년(선조 25) 양산 군수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래읍성에 와서 동래 부사 송상현(宋象賢)과 함께 성을 지키고, 나라를 위해 죽을 결심한 후 양산으로 돌아가 그의 어머님께 하직 인사를 하고, 아들 조정로(趙廷老)에게 부탁하기를 “너의 아버지는 나라를 위하여 싸움터에 나아가니 너는 늙으신 어머님을 잘 모시고 고향에 돌아가라”고 하였다. 그 후 조영규는 동래읍성으로 돌아와 송상현을 도와 힘껏 싸우다가 순직하였다.

아들 조정로는 할머니를 모시고 한 달이 넘도록 낮에는 숨고 밤에는 걸어서 고향인 장성에 도착하여 할머니를 깊은 벽지(僻地)에 모셔 놓고, 조영규가 이미 죽은 줄 알고 머리를 풀고 걸어서 동래에 이르니 온 성에 시체가 쌓여 가득하므로 아버지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초혼(招魂)하여 고향으로 돌아가서 허장(虛葬)하였다. 조정로는 적과 함께 하늘을 같이할 수가 없어 한 개의 토실(土室)을 지어 문을 닫고 나오지 않고 20년을 애모(哀慕)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1667년(현종 8)에 이르러 장서 사람들이 조영규 부자를 모암 서원(慕巖書院)에 모시고, 2년 후 송준길(宋浚吉)이 왕에게 조영규 부자의 충효를 아룀으로써 정려(旌閭)를 명하고 충효 양문(兩門)을 세우게 하였다. 조영규는 1696년(숙종 22) 양산 충렬사에, 1709년(숙종 35) 동래 충렬별사(忠烈別祠)에, 1736년(영조 12) 동래 충렬사에 각각 모셔졌다. 숙종조영규에게는 호조 참판을, 아들 조정로에게는 빙고 별검(氷庫別檢)을 각각 추증하였다.

[건립 경위]

임진왜란 때 순절한 동래 부사 송상현, 부산진 첨사 정발(鄭撥)을 제사 지내기 위해 17세기 전반쯤에 동래읍성 밖 농주산 전망 제단을 설치하고 동래 향교 교수 노개방(盧盖邦) 등과 함께 순절한 여러 사람들을 차례로 더 모시게 될 때 건립된 것이 아닌가 한다. 1742년(영조 18) 농주산 전망 제단을 옮겨 송공단을 건립할 때 이전하였고, 1766년(영조 42) 송공단 보수 때는 동쪽 1단으로 옮겼으며, 1767년(영조 43) 보수 때는 동쪽 1단에 두었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조선 시대와 다르게 배치되었다가 2005년에 1767년 때와 같이 바로잡았다.

[위치]

조영규 순난비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229-78번지 일원에 있는 송공단 안에 있다.

[형태]

조영규 순난비노개방 순난비(盧盖邦殉難碑)가 세워진 송공단의 동쪽 1단은 가로 155㎝, 세로 91㎝, 높이 74㎝ 크기의 직육면체이고, 단 위에 사각형의 좌대(座臺)를 놓고, 그 위에 화강암으로 만든 비신(碑身)만을 얹었다. 비신의 머리는 반원형으로 다듬어져 있다. 비의 크기는 높이 92㎝, 너비 29㎝, 두께 12㎝이다.

[금석문]

비석에는 ‘조공 영규 순난비(趙公英珪殉難碑)’라고 새겨져 있다. ‘규(珪)’는 ‘규(圭)’의 잘못된 표기이다.

[현황]

조영규 순난비의 서쪽에 있는 송상현 순절비(宋象賢殉節碑)와 동쪽에 있는 노개방 순난비를 비롯하여 송공단에 있는 7단 15기 비석 등과 함께 소유자인 부산광역시 동래구에서 보존·관리하고 있다. 1972년 6월 26일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11호로 지정된 송공단의 부속 단비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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