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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3280
한자 朴孔杓
영어음역 Bak Gongpyo
이칭/별칭 박일형(朴日馨)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장선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경력 신탁통치배격위준비회 선전부장
출생 시기/일시 1904년 12월 5일연표보기 -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4월 5일 - 기장면 3·1 운동 주도
활동 시기/일시 1904년 - 집행 유예를 선고 받음
활동 시기/일시 1922년 - 기장기독청년회 여자 야학 교사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22년 11월 - 기장노동혁신회 지육부 서기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26년 7월 - 동래청년연맹 상무로 선출
활동 시기/일시 1928년 2월 19일 - 기장정진청년회 가입
활동 시기/일시 1928년 5월 - 동래청년동맹 집행 위원으로 선출
활동 시기/일시 1928년 5월 - 경남청년연맹 집행 위원 및 순회강연대원으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28년 8월 - 동래노동조합 정치문화부 간사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29년 1월 - 신간회 동래지회 사무재정부 간사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29년 4월 - 동래청년동맹 집행 위원장으로 선출
활동 시기/일시 1929년 6월 - 동아일보사 동래지국 기자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30년 1월 - 동래기자단 위원 대표로 선출
활동 시기/일시 1930년 4월 17일 - 동래기자단 사건으로 부산지방법원에서 6월형을 선고 받음
활동 시기/일시 1930년 6월 5일 -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 집행 유예 5년형을 선고 받음
활동 시기/일시 1932년 5월 5일 - 메이데이 격문 사건으로 체포됨
활동 시기/일시 1933년 9월 - 적색노조와 적색독서회 사건으로 체포됨
활동 시기/일시 1945년 8월 17일 -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경남본부 선전부장으로 선출
활동 시기/일시 1945년 10월 5일 - 경상남도 인민위원회 선전부장으로 선출
활동 시기/일시 1945년 12월 - 신탁통치배격위준비회 선전부장으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60년 - 혁신동지총연맹 동래 지역 공천을 받음
출생지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
거주|이주지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 260-1
거주|이주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원남동 66-1
학교|수학지 사립기장보통학교 -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 320지도보기
활동지 부산광역시 동래구
활동지 서울특별시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본관은 밀양. 별칭은 박일형(朴日馨)이다. 아버지는 박세규(朴世珪)이고, 어머니는 김덕윤(金德允)이다. 기장 갑부로 부산에서 고려상회를 운영하였고 조선국권회복단에 관여한 박인표(朴仁杓)가 큰형이고, 항일 운동가 박영출(朴英出)이 조카이다. 장인은 3·1 운동의 학생 대표였으며 해방 후 민주주의민족전선 경상남도위원회 의장이었던 김형기(金炯璣)[김동산]이다.

[활동 사항]

박공표(朴孔杓)[1904~?]는 1904년 12월 5일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사립기장보통학교 4회 졸업생이며, 졸업 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였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으로 내려와 기장면 3·1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전국으로 확산되는 3·1 운동의 소식과 동래 장터의 3·1 운동 소식이 기장에 전해지자 김수룡(金壽龍)·박공표·김도엽(金度燁)·권철암(權鐵巖)·구수암(具壽巖)·최기복(催基福)·이택규(李澤奎)·오기원(吳基元) 등 기장 지역 청년들은 거사를 계획하였다. 이들은 4월 5일 기장 장날 오전 11시로 거사 일정을 정하고, 기장면사무소에 근무하는 최창용(崔昌鎔)을 통해 기장면사무소의 등사판과 등사 원지를 빌려 옛 기장 장관청(將官廳) 등에서 독립 선언서를 등사하였다.

기장 장날인 4월 5일이 되자 박공표를 포함한 주동자들은 ‘양심발원(良心發源) 인도적 자유 민족’, ‘조선 독립 만세, 조선독립단’이라고 대서특필한 큰 깃발을 들고 기장 장터에 도착해 장터 사람들에게 독립 선언서를 배포하며 기장면 3·1 운동을 주도하였다. 박공표는 많은 동지들과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부산지방법원에서 집행 유예를 받았다.

박공표는 3·1 운동 이후 본격적으로 사회 운동에 뛰어들었다. 1922년 기장기독청년회가 운영하는 여자 야학의 교사로 활동하였고, 1922년 11월 기장노동혁신회를 창립하고 지육부 서기로 활동하였다. 1925년 동래청년연맹 결성과 함께 활동하다가, 1926년 7월에는 상무에 선출되었다. 1928년 2월 19일 기장 지역 청년 운동의 핵심 단체인 기장정진청년회에 가입하였다. 1928년 2월 동래청년동맹을 결성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5월에는 동래청년동맹 집행 위원이 되었다. 1928년 5월 경남청년연맹 집행 위원 및 순회강연대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28년 8월 동래노동조합 정치문화부 간사, 1929년 1월 신간회 동래지회 사무재정부 간사, 1929년 4월 동래청년동맹 집행 위원장로 선출되어 동래 지역 뿐 아니라 경상남도 지역에서 청년·노동 운동 등 사회 운동에 힘썼다. 그리고 1929년 6월 동아일보사 동래지국 기자로 활동하였다. 1929년 10월 언론 강압 규탄 연설로 동래경찰서에 검속되었다. 1930년 1월 4일 동래기자단을 조직하고 위원 대표로 선출되었다. 1930년 4월 17일 부산지방법원에서 동래기자단 사건으로 징역 6개월을 선고 받고, 1930년 6월 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 집행 유예 5년형을 선고 받았다.

서울로 올라가서 활동하던 중 1932년 5월 5일 메이데이 격문 사건으로 경기도 경찰부에 체포되었으나 무혐의로 석방되었다. 1933년 9월경에는 조선 공산당 재건을 위한 적색노조와 적색독서회 사건의 혐의를 받아 서울 서대문경찰서 고등계에 체포되어 취조를 받았다. 1930년대 초반 조선 공산당 재건 활동에 이어, 1930년대 중반 국제 공산당 사건으로 이재유(李載裕) 등과 함께 체포되는 등 지속적으로 활동하였다.

해방 후 1945년 8월 17일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경남본부 선전부장으로 선출되었고, 1945년 10월 5일 경상남도 인민위원회 선전부장이 되었다. 1945년 12월에는 신탁통치배격위준비회 선전부장으로 활동하였으며, 경남기자회 위원장을 맡았다. 1960년에는 장건상(張建相)을 중심으로 결성된 정당인 혁신동지총연맹에서 동래 지역 공천을 받고 활동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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