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15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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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英出 |
영어음역 | Bak Yeongchul |
이칭/별칭 | 현출(炫出),정인(盯仁)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차성로 300[동부리 170]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차철욱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주의 운동가.
[가계]
자는 현출(炫出), 호는 정인(盯仁). 아버지는 박인표(朴仁杓)이고, 어머니는 김씨이다. 아버지 박인표는 대지주였고 1910년대 조선국권회복단, 대동청년단, 대한광복회 등과 연결된 광복회를 조직하였다. 박인표는 경제 부문에서 고려상회·동래은행, 교육 부문에서 명정의숙과 깊이 관련되어 있었다. 숙부 박공표(朴孔杓)는 기장 3·1 운동 주도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5촌 당숙 박맹표는 기장의 대지주로 기장 지역의 사회 운동을 후원하였으며, 창씨개명을 거부하였다. 외삼촌 김철수는 1919년 일본 도쿄에서 2·8 독립 선언을 주도하였고, 정부 수립 후 경남도지사를 지냈다.
1928년 일신여학교를 졸업한 김소애와 결혼하여 2남 1녀를 두었다. 장인은 동래의 부자 김봉상이었다. 손위 동서 김용규는 동래 지역에서 청년 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사상 단체 혁파회의 회원이었다.
[활동 사항]
박영출(朴英出)[1908~1938]은 1908년 3월 20일 동래군 기장면 동부리 170번지[현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 170번지]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기장공립보통학교를 다닐 때 3·1 운동을 목격하였다. 1920년 3월 기장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1년 동래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기장에서 학교까지 기차로 통학하면서, 기장학우회 회장으로서 학생들의 단결과 항일 정신을 길러 주었다. 1920년 11월 17일 부친 박인표가 사망한 뒤 가세가 기울자 동래로 이사하였다.
1925년 7월 전교 학생 회장과 학급 급장을 맡고 있던 박영출은 동맹 휴학을 주도하였다. 새로 부임해 온 일본인 교장 오타 노부유키[大田信之]는 교내에서 조선어의 사용을 금지하고 식민지 교육에 순종할 것을 학생들에게 강요하였다. 또 한문 담당 교사 이희보의 부당한 교육 방침과 학생 세 명의 퇴학도 학생들의 분노를 샀다. 이에 박영출은 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 400여 명을 규합하여 7월 6일 동맹 휴학을 이끌었다. 경찰이 동맹 휴학을 수사하였고, 학교 측은 학생 234명을 정학시켰다. 학부형들의 중재로 사태가 마무리되었으나 학교 측의 감시는 더욱 엄격해졌다.
1926년 2월 기숙사 사감인 마쓰다[松田]가 조선인 학생을 비하하는 발언을 하자, 박영출은 졸업을 한 달 남겨둔 상태에서 장산 촛불 시위 사건을 주도하고 퇴학을 당하였다. 1927년부터 1930년까지 일본 야마구치고등학교[山口高等學校]에서 생물학을 공부하였다. 당시 일본 내 다양한 공산주의 사건이 일어났다. 박영출 또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1930년 교토대학[京都大學] 경제학부에 입학하였다.
잠시 귀국한 박영출은 1931년 3월 5일 동래구 수안동 광장에서 일제의 탄압과 식민지 정책을 규탄하였다. 같은 해 9월 7일에는 동래청년동맹에서 주관하는 강연회에서 ‘청년과 종교’라는 주제로 식민지 조선에서 청년의 역할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박영출의 민족주의 활동은 검거와 구속으로 이어졌다. 1930년 교토대학 재학 시절에는 재일 한인 학생 강연회에서 조선 독립을 호소하다가 체포되었다. 이어 1931년 3월 동래구 수안동 집회 결과 체포되어 징역 6월, 집행 유예 2년을 선고 받았다. 일본에서 1933년 2월 공산주의 운동을 원조한 혐의로 구속되어 기소 유예 처분을 받기도 하였다.
1934년 봄에 귀국한 박영출은 외숙부 김철수를 중심으로 한 인맥과 함께 조선광복청년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34년 5월 서울에서 동경고등사법학교를 졸업한 울산 출신 이관술과 조선공산당재건 경성재건그룹 운동을 주도한 이재유를 만났다. 박영출은 공산당 재건과 노동 운동을 지도하는 역할을 하였다. 1935년 3월 조선공산당 재건과 적색노동조합을 조직하였다는 이유로 「치안 유지법」 위반 혐의로 검거되었다. 1936년 7월 30일 징역 4년형을 선고 받았다. 대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38년 8월 2일 3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묘소]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연화리 연화봉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77년에 건국 포장, 1990년에 건국 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동래고등학교는 1978년 3월 20일 졸업식에서 미망인 김소애 여사에게 명예 졸업장을 전달하였다. 1984년 10월 정부 주도로 추모 비석이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