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2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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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釜山東萊貝塚 |
영어의미역 | Shell Mound in Dongnae in Busa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천로319번길 60[낙민동 100-18] |
시대 | 고대/초기 국가 시대/삼한 |
집필자 | 이연심 |
[정의]
부산광역시 동래구 낙민동에 있는 삼한 시대의 패총 유적.
[개설]
1970년 6월 국립중앙박물관은 부산 동래 패총이 주택가 아래에 있어서 일부만 집중적으로 조사하여 제철과 관련된 유적을 발견하였다. 1993년 2월 15일부터 3월 16일까지 부산직할시립박물관이 이 지역을 사적지로 정비하는 과정에서 여러 문화층을 조사하여 삼한 시대의 제철 시설과 유물들을 다량 수습하였다.
[위치]
부산 동래 패총은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천로319번길 60[낙민동 100-18]에 있으며, 동해 남부선 동래역 철길 인근 주택가에 위치한다.
[형태]
구릉 지대에서 낮은 저습지 쪽으로 경사지게 형성되어 있다. 모두 20개 이상의 작은 층위가 확인되었는데, 흙과 조개껍데기가 섞인 제2층~제7층까지 조개껍데기층[패각층(貝殼層)], 조개껍데기가 거의 없는 제8층 이하의 아래층으로 구분할 수 있다. 위층에서는 시루·연질 항아리·화로 모양 토기·야요이 토기 등의 토기들과 뼈로 만든 도구, 사슴·소·말·멧돼지 등의 동물 뼈가 출토되었다. 이 가운데 큰 항아리와 목 짧은 항아리[단경호(短頸壺)]는 비교적 단단한 도질 토기(陶質土器)이고, 나머지는 와질 토기(瓦質土器)나 연질 토기(軟質土器)이다.
아래층에서는 화로 모양 토기·시루·항아리·목 짧은 항아리 등의 토기와 가락바퀴·칼자루·뼈로 만든 화살·쇠도끼·쇠낫·쇠침 등이 출토되었는데, 도질 토기는 없고 와질 토기와 연질 토기뿐이었다. 또한 그 아래층에서는 불에 탄 흙덩어리와 숯이 출토되었는데, 여기에 풀 잎사귀 같은 것들이 섞여 있었다. 껍질은 홍합·굴·대합·바다고둥 등이 채집되었다.
한편 부산 동래 패총 북쪽 가장자리 부분의 아래층에서 원형에 가까운 평면 모양의 건물터가 확인되었다. 이 건물터는 모래 성분이 많은 흙 위에 황색 점토를 깔아 바닥을 만들었는데, 바닥은 경사면을 따라 북동쪽이 높고 남서쪽이 낮아 경사면을 이루며 불을 맞아 아주 단단하였다. 그리고 건물터의 바닥 일부에는 목탄과 풀 잎사귀 같은 것이 깔려 있었는데, 목탄이 집 가운데로 향하여 모아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천장 구조물로 추정된다.
1970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조사할 때에는 회색 점토층에서 다량의 재와 불 맞은 흙, 숯 부스러기와 함께 철 불순물 등이 흘러내려 굳어진 탄탄한 쇠똥층이 아래위로 2~3㎝ 내지 10㎝ 정도의 사이를 두고 여러 겹 층을 이루며 깔려 있었다. 이 지층은 원래의 지형을 따라 서쪽으로 경사지게 형성되어 있었는데, 북쪽의 제일 높은 곳에 쇠를 만들었던 곳으로 판단되는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곳은 소규모의 간단한 반지하식 구조로 길이가 75㎝, 너비 25㎝, 깊이 18㎝이다. 남아 있는 상태가 좋지 못하여 원래의 모습이 확실하지는 않지만 고대 제철 시설의 일부로 추정되고 있다.
[현황]
부산 동래 패총은 유적의 남서쪽으로 100m 앞쪽에는 금정산에서 발원된 온천천이 흐르고, 동쪽으로 400m 정도 되는 지점에서 거제천과 합류된다. 현재의 해안선은 유적으로부터 약 6㎞ 정도 떨어져 있다. 낮은 구릉 지대의 서남쪽 경사면 일대에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던 대규모의 유적이었으나, 현재는 대부분 파괴되거나 소멸되었고 구릉 지대의 1,365㎡만 사적 제192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사적으로 재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부산 복천동 고분군이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는데, 이를 통해 이 시기의 지배 집단이 남긴 중심 유적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외래 토기 등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이들은 원거리 대외 무역을 주도하면서 왜를 비롯한 진한·마한과 활발한 교역을 전개하였고, 4세기쯤 금관가야의 중추 세력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제철 관련 유적과 유물이 확인되었는데, 이는 이 지역이 철 생산의 중심지였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철은 당시 사회 문화 수준의 척도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부산 지역과 낙동강 하류 지역에서 많이 생산된 철은 이들 지방의 농경문화와 사회 경제를 발전시킨 기반이 되었을 것이며, 또 새롭게 등장한 가야가 발전할 수 있는 촉진제가 되었을 것이다. 부산 지역의 삼한 시대 문화는 철기를 바탕으로 동래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