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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3162
한자 統一新羅時代-文化遺産
영어의미역 Cultural Assets of the Unified Silla Period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집필자 홍보식

[정의]

통일 신라 시대 부산 지역의 문화유산.

[개설]

통일 신라 시대 부산 지역의 문화유산으로는 성곽·사찰·생산 시설·제사 유적·마을·무덤 등의 유적과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이 알려져 있다.

[불교 관련 문화유산]

사찰로는 범어사장안사, 선여사가 통일 신라 시대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지만, 석탑·부도·석등 등 석조물 일부만 현존하고, 이외의 것은 남아 있지 않다. 현존하는 통일 신라 시대의 석조물로는 범어사 삼층 석탑[보물 제250호]·범어사 석등[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6호]·범어사 석조 연화 대좌 하대석[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73호]와 원효암 동편 삼층 석탑[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1호]·원효암 서편 삼층 석탑[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2호]이 있다.

[성곽]

성곽으로는 동래 고읍성과 배산성지가 있다. 수영구 망미동 일대에 위치한 동래 고읍성은 부산지방병무청 청사의 건립으로 일부 조사가 이루어졌다. 조사 결과, 동래 고읍성은 흙으로 판축한 토성이며, 지형상 구릉 하단 일부에 펼쳐진 평산성으로 방형의 형태를 띠고 있다. 동래 고읍성은 내측과 외측 기단에 석렬을 쌓고 석렬 내측과 상부에 흙을 판축한 토성으로서 성벽의 너비가 약 920㎝, 잔존 높이는 가장 높은 곳이 230㎝ 정도이다.

토성 안에는 건물 터와 우물, 건물과 관련된 지진구(地鎭具), 쓰레기 매립장 등의 유구와 각종 기와와 토기 등 건물 또는 생활과 관련된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특히 많은 양의 기와와 함께 ‘동래군(東萊郡)’ 명의 기와가 많이 출토되어 이곳이 동래 고읍성 터로서 동래군의 치소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은 9세기의 것으로, 9세기에 동래 고읍성이 축성되었다가 조선 시대에 새로운 동래읍성이 현재의 동래구 명륜동복천동 일대에 만들어지면서 중심지 역할을 상실한 것으로 추정된다.

배산성지는 서쪽 정상부를 정점으로 상대적으로 지형이 높은 남쪽의 9부 능선을 에워싸고 동쪽과 북쪽의 계곡을 감싼 산성이다. 정밀한 측량 조사에 따르면, 배산성은 동쪽의 수영구청이 관할하는 체육 시설 부근과 북쪽의 집수정 아래까지에 걸치는 꽤 큰 규모의 산성이었음이 확인되었다. 배산성지는 성벽의 길이가 1.17㎞, 성안 면적은 4만 1823㎡이고, 성벽의 잔존 상태가 양호하다.

산성의 평면 형태는 지형을 고려한 결과 부정형을 이루고, 성벽은 전체적으로 유실이 많이 되어 있으며 자연 구릉의 외면을 삭토하거나 일부 할석을 이용한 외벽에 흙을 덧대었다. 성내에서 건물 터·집수지·문지 등의 부속 시설 터가 확인되었다. 배산성은 독립된 산성이 아니라 배산성 남쪽의 평지성인 동래고읍성과 연계된 배후 산성으로서 통일 신라 시대의 관방 체제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생활 유적]

삼국 및 통일 신라 시대의 취락과 생산 유적인 고촌리 유적수영강의 지류인 안평천 상류의 북쪽 사면에 위치하며, 삼국 및 통일 신라 시대의 생활 모습을 복원할 수 있는 다양한 자료가 확보되었다. 통일 신라 시대의 유구로는 구상 유구, 자갈이 깔린 도로, 수십 동의 굴립주 건물지, 연속된 부정형 수혈, 원지(園池), 우물 등이 확인되었다. 도로와 우물, 원지 등의 유구에서 다양한 유물들이 확인되었다.

1. 도로 유적

명례리 도로 유적에서 삼국 시대부터 통일 신라 시대까지 사용한 도로와 각종 수혈 유구가 확인되었다. 도로는 단단하지 않은 지면 위에 사람 주먹 크기만한 돌과 그보다 작은 자갈을 깔아 만들었고, 수레바퀴가 지나간 홈이 같은 간격으로 나 있다. 수레바퀴로 인해 만들어진 홈의 폭은 10㎝ 내외이고, 수레바퀴 간의 간격은 90㎝ 내외이다. 도로는 울산 방향에서 기장읍 방향으로 향한다.

도로 좌우에는 부정형의 수혈이 다수 분포하는데, 수혈은 깊이가 얕고, 시루·유개합(有蓋盒)·완(碗)·큰 항아리·옹(甕) 등 생활에 사용된 많은 수량의 토기가 출토되었다. 도로 좌우에 수혈이 다수 분포하는 점을 볼 때, 이곳 일대가 당시에는 정차 지점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도로와 수혈은 통일 신라 시대 부산 지역의 도로망과 도로와 관련한 시설물 등 교통 체계를 연구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2. 건물 및 주거지 유적

통일 신라 시대의 건물 및 주거지의 일면을 보여 주는 유적이 해운대구 송정동기장군 기장읍 동부리에서 조사되었다. 송정동 유적해운대구 송정동 답29-4번지, 송정동 60-1번지, 송정동 61-9번지 일대로서 곽걸산의 동쪽에 형성된 충적지에 위치한다. 이곳에서 건물 터·수혈 유구·우물·석렬·하천 등이 확인되었다. 건물 터는 심하게 파괴되어 구체적인 구조와 형식은 알 수 없지만, 바닥에 많은 기와편이 깔려 있어 기와지붕을 한 건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건물 터로부터 동북쪽으로 13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수혈 주거지는 가로 350㎝, 세로 350㎝의 방형이고, 동쪽으로 치우쳐 화덕 자리가 있다. 기둥 구멍 등은 확인되지 않아 어떤 구조의 지붕이었는지 확인할 수 없다.

수혈 주거지에 인접해서 우물 1기가 있고, 주거지 앞쪽의 자연 하천 건너편에 우물 1기가 있다. 우물은 모두 석조이고, 평면 형태는 원형이고, 깊이는 180~220㎝로 깊지 않다. 우물 내부에서는 옹·합·호·병 등이 출토되었다. 2호 우물에서 출토된 횡병(橫甁)은 목곽 몸통에 일조 직선의 점열문(點列文)과 기하학적 문양이 장식되었다. 함께 출토된 호의 표면에는 연속 마제형문(連續馬蹄形文)과 다변화문이 장식되었다.

출토된 유물의 특징을 볼 때, 우물은 8세기 전반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외에도 건물 터와 주거지 앞쪽에 자연 하천이 흐르고, 하천 내부에서 통일 신라 토기가 다수 출토되었다. 생활 유구와 출토 유물 등을 고려하면, 8세기 전반부터 이곳 일대에 기와 건물과 우물 및 수혈 주거지로 이루어진 마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 산3-4번지기장 체육관 건설 부지에서 조사된 건물 터는 자갈을 채운 원형의 적심석과 적심석으로부터 북쪽으로 5.4m 떨어진 곳에 2단의 석축 시설이 있다. 적심 간의 거리는 1.5~3m로 일정하지 않지만, 잔존한 적심을 통하여 볼 때, 정면과 측면이 3칸 정도인 남향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석축 시설은 동쪽에서 남쪽에 ‘ㄱ’자 식으로 꺾이는데, 많이 남아 있는 곳은 3단 정도이다. 석축이 ㄱ자 식으로 꺾이는 지점에서 선조문(線條文)이 시문되고, 두께가 1㎝ 내외로 얇고, 단판의 타날 판을 사용한 평기와가 많이 출토되었다. 막새기와는 출토되지 않았지만, 건물의 규모가 크고 이중으로 된 기단 시설이 설치된 건물로서 일반 가옥보다는 공공 시설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생산 시설]

생산 시설로는 금정구 두구동에 있는 임석 유적에서 발견된 토기 가마와 해운대구 좌동송정동의 경작 유구가 알려져 있다. 임석 유적의 토기 가마터는 삼국 시대 6세기 전반의 고분군이 조성된 구릉의 남쪽 사면에 위치하며, 지하에 굴을 파서 만든 지하식 등요(登窯)이다. 아궁이 부분은 사유지로 인해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가마는 굴뚝 쪽이 넓고, 아궁이 쪽으로 가면서 너비가 줄어든다. 확인된 전체 길이는 445㎝, 최대 너비 150㎝, 최소 너비 90㎝이다. 소성실의 바닥은 비스듬하게 경사를 이루는데, 경사도가 13°이다. 굴뚝은 소성실 바닥이 ‘ㄴ’자 식으로 꺾이면서 위로 올라간다. 소성실의 끝 부분에서 10여 점의 토기가 출토되었는데, 대부분 적갈색 연질완(軟質碗)이고, 도질제의 항아리편도 포함되어 있었다.

해운대구 좌동송정동의 경작 유구는 계단식의 면적이 좁은 논으로서 논둑은 확인되지 않았다. 논 층에 유기물 집적이 많은 점이 특징이며, 논바닥에서 각종 토기편이 출토되었다. 이 토기들은 논이 더 이상 경작되지 않으면서 유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제사 유적]

달음산 제사 유적은 기장군의 최고 주봉인 달음산 정상[587m]과 정상에 이르기 직전의 사면에 위치한다. 정상과 사면에는 통일 신라 시대의 토기를 비롯하여 조선 시대의 분청사기와 백자, 기와편이 다수 채집되었다. 달음산 정상은 동해안과 기장군 일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어서 제천 의식을 행하기에 좋은 위치이다. 아마 통일 신라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이곳에서 제사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무덤]

무덤으로는 기장군 철마면에 있는 고촌리 유적, 덕천동 고분군, 노포동 유적, 부산 오륜대 고분, 청강리 고분군, 교리 유적, 명례리 고분군, 기장 월드컵빌리지 조성 지역의 고분군, 연산동 고분군 등이 알려져 있다. 부산 지역의 통일 신라 시대 무덤군의 수와 무덤 수는 삼국 시대와 비교하면 현저하게 적다. 통일 신라 시대에 들어와서 무덤 수가 줄어든 것은 통일 신라 시대에 부산 지역이 변방으로 전락하면서 큰 집단이 형성되지 않았고, 또 화장에 의한 산골(散骨)이 행해졌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지금까지의 조사에서 확인된 부산 지역의 통일 신라 시대 묘제는 대부분 앞트기식 돌방이다. 앞트기식 돌방은 무덤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고, 하나의 돌방에 여러 명을 매장하는 묘제로서 6세기부터 신라 지역에 유행하였다. 앞트기식 돌방은 여러 명을 매장할 수 있지만, 부산 지역의 앞트기식 돌방에는 매장이 한 차례 이루어졌거나 또는 1회의 추가 매장된 것만 확인되었다. 통일 신라 시대에서 고려 시대로 전환하는 시기의 무덤은 확인되지 않아 전환기의 모습을 알 수 없는 한계가 있다.

[의의와 평가]

통일 신라 시대의 문화유산은 불교 관련 석조물이 일찍부터 알려져 왔고, 대부분은 범어사 경내에 소재한다. 불교 관련 문화재 이외에 건물 터·주거지·성곽·생산 시설·도로·우물 등 일상생활을 보여 주는 문화재와 매장 문화를 나타내는 무덤 등은 2000년대 이후에 들어와서야 확인되기 시작하였고, 현재도 부산 시내 각지에서 조사되고 있다.

일상생활의 모습을 부분적으로 알려 주는 문화재가 지속적으로 발견되면서 통일 신라 시대 부산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구명할 수 있는 기초적인 정보가 집적되었다. 이를 통해 당시의 모습을 부분적으로나마 밝힐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조사된 문화재 중 무덤을 제외한 여타의 문화재는 대부분 그 시기가 9세기 이후의 모습을 알려 주고,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후반까지 통일 신라 시대 전반기의 모습을 알려 주는 자료는 거의 확인되지 않았다. 그리고 9세기의 자료라고 하더라도 당시의 사람들이 향유하였던 것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으므로, 통일 신라 시대의 일상생활 모습을 알려 주는 문화재 발굴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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