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17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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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秉圭 |
영어음역 | Gim Byeonggyu |
이칭/별칭 | 정산(井山) |
분야 |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232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장선화 |
[정의]
일제 강점기와 현대 부산 출신의 기업가이자 행정가.
[가계]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정산(井山). 1880년[또는 1887년] 12월 11일 부산광역시 동래구에서 태어났다. 동래기영회 회원으로 동명학교 제3대 교장을 역임한 지전(芝田) 이광욱(李光旭)이 외삼촌이고, 동래기영회 회장을 역임한 이회보가 외사촌이다.
[활동 사항]
김병규(金秉圭)는 어려서 외가에서 성장한 탓에 한학자이자 외삼촌인 이광욱에게서 한학을 배웠다. 크면서 개양학교에 들어가 1906년에 졸업하였다. 이후 삼락학교[개양학교를 흡수, 동명학교로 개칭함]에서 교편을 잡았다. 1918년 동래 지방의 유력자인 윤병준(尹炳準), 박인표(朴仁杓), 오태환(吳泰煥) 등이 설립한 동래은행 본점의 지배인으로 취임하면서 경제인으로서 첫 발을 내딛었다.
1931년에 김병규는 동래은행 상무를 역임하였고, 1933년 7월에 동래은행이 호남은행에 합병될 때까지 은행가로서 활동하였다. 1919년 안희제(安熙濟)가 결성한 부산예월회 회원으로 참여하여 지역 운동에도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1921년 안희제와 함께 부산고등보통학교 설립에 힘을 기울였으나 실패하였다.
김병규는 또한 동래면 협의원과 동래읍 의원, 경상남도 의원 등을 역임하였다. 1920년 7월에 지방 제도가 개편되면서 1923년 동래면이 지정면으로 바뀌어 5월 21일 첫 동래면 협의회 선거가 실시되자, 김병규는 10명의 조선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당선되었고, 이어서 그 해 9월 동래면 유지들의 추천으로 동래 면장에 임명되었다. 1931년 김병규는 동래면이 읍으로 승격된 후 그 해 5월 21일에 실시된 동래읍 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후 계속 동래읍 의원으로 활동하였다.
경상남도 도의원으로도 활동했던 김병규는 일본 아동에게만 의무 교육을 시키는 현실에 반발하여 1929년 경상남도 도회에서 예산안 심의를 거부하는 한편, 창씨개명 반대와 한글 폐지 반대 등을 주장하는 활동을 펼쳤다. 그는 또 농촌 부흥에 관심을 가지고 1933년 동래산업조합을 만든 후 초대 조합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해방 후 김병규는 미군정청에 의해 경상남도 내무국장을 거쳐, 초대 경상남도 도지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지속적으로 육영 사업에 관심을 가지고 부산 지역 민립대학기성회 발족에도 힘을 기울여 부산대학교가 설립되는 데 공을 세웠다. 1962년[또는 1960년]에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