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17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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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休山驛 |
영어의미역 | Hyusan Statio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수안동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한정훈 |
[정의]
조선 전기 부산광역시 동래구 수안동에 있던 황산도의 출발역.
[제정 경위 및 목적]
고려 시대 동래현 읍치(邑治)에는 역참 시설이 없었고, 북 8㎞[20리] 지점에 소산역만 위치하였다. 이후 조선 시대에 들어와 동래 도호부 읍치에 역참 시설이 설치되었다. 그런데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1425]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소산역과 함께 동래신역(東萊新驛)이 확인되는 반면, 1462년(세조 8)부터는 소산역과 휴산역(休山驛)이 각각 확인된다. 이러한 조선 초기의 동래 지역의 역참 설치 현황을 통해 동래신역이 휴산역으로 역명(驛名)이 개명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기장현의 기장신역(機張新驛)에서 신명역(新明驛)으로의 개명도 마찬가지이다.
[관련 기록]
『세조실록(世祖實錄)』 권29, 세조 8년 8월 5일 기사에 “휴산역·신명역 …… 이상 11역은 황산도 역승으로 일컫고[休山驛·新明驛 …… 已上十一驛 稱黃山道驛丞]”라고 기록되어 있고, 『동래부 읍지(東萊府邑誌)』[1759] 역원에 “휴산역은 부의 남쪽 1리에 있다. 동쪽 기장 고촌역과의 거리는 20리이며, 서쪽 김해 남역과의 거리는 45리이고, 북쪽의 소산역과의 거리는 20리로 중마 2필, 복마 5필, 역리 166명, 노비 30구이다[休山驛 在府南一里 東距機張古村驛二十里 西距金海南驛四十五里 北距蘇山驛二十里 中馬二匹 卜馬五匹 驛吏一白六十六名 奴三十口]”라고 적혀 있다.
[내용]
휴산역의 위치는 동래 읍성 남문을 나와 농주산[부산동래경찰서 자리] 옆 수영으로 가는 길목[부산광역시 동래구 낙민동]에 자리 잡고 있었다. 『동래부지(東萊府誌)』[1740] 각면 각리 원근 정도조를 보면, 동래부 읍내면에 휴산동(休山洞)이 있다. 그 뒤의 1915년에 작성된 지적 원도(地籍原圖)에는 휴산동이 생민동(生民洞)으로 바뀌었다. 휴산역이 위치하였던 오늘날의 부산광역시 동래구 수안동은 조선 시대에 휴산역에서 파생한 동리 명칭인 휴산동으로 불렸다.
휴산역에서 북쪽으로의 행로는 동래 읍성 밖 남문·서문·암문을 거쳐 명륜초등학교~온천장 교차로로 향한다. 동래 읍성 암문에서 온천장 교차로까지 가는 길을 ‘큰나들이길’이라고 하였다. 이 길은 동래 부사가 부임이나 이임할 때 늠름한 행렬이 자못 장엄하여 ‘큰나들’이라 하였다. 이 큰나들이의 ‘큰’이 ‘대(大)’로 바뀌어 ‘대낫들이’가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시작한 노정은 소산역을 경유하여 양산~밀양으로 이어진다. 여기에서 경상북도 청도군~경산~대구까지 올라가는 길이 영남 대로(嶺南大路)이다. 휴산역은 한반도의 주요 간선 도로인 영남 대로의 종착역인 셈이다.
반대로 남쪽의 행로는 이섭교(利涉橋)를 지나 좌수영으로, 세병교(洗兵橋)를 지나 부산진으로 각각 향하였다. 이곳 해안 포구에 이르러 연안 항로나 일본으로 나아갈 수도 있었다. 또한 동쪽의 기장현으로 향하는 노선은 동래와 기장의 경계에 해당하는 신명역[기장군 철마면 안평리]을 경유하여 동남 해안을 따라 개설된 역로를 통해 울산~경주 방면으로 이를 수 있다. 마지막으로 낙동강 하류를 건너 김해를 통해 서쪽으로 나아갔다.
휴산역이 동래 도호부의 중심 역인 만큼 주변의 역참 시설보다는 역마(驛馬)나 역인(驛人)이 많이 배정되었다. 18세기 중반에 간행된 『동래부 읍지』에 따르면 휴산역에는 중마 2필, 복마 5필, 역리 166명, 노비 30구가 배속되어 있었다.
[변천]
동래신역·기장신역을 비롯한 조선 전기의 신역(新驛)은 세종 재위 말엽에 개명하여 그 기능을 전승받은 역참 시설로 1895년(고종 32)까지 존속하였다.
[의의와 평가]
휴산역은 동래 도호부의 교통 기점이면서 서울~동래 간 영남 대로의 종착역이었다. 그런 만큼 해당 지점에 그 역사성을 알릴 수 있는 기념물이나 표지석을 설치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