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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1689
한자 鄭文道
영어음역 Jeong Mundo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왕족·호족
지역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동평로 335[양정동 464-1]
시대 고려/고려 전기
집필자 전기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호장
성별
본관 동래
거주|이주지 동래 흑암리 - 부산광역시
활동지 동평현 - 호장
묘소|단소 화지 공원 -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양정동 464-1지도보기
사당|배향지 추원사 -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양정동 464-1지도보기

[정의]

고려 전기 부산 출신의 호장(戶長).

[가계]

본관은 동래(東萊). 아버지는 동래 지역의 호장 정지원(鄭之遠)으로 동래 정씨(東萊鄭氏)의 기세조(紀世祖)이다. 아들은 대부경 정목(鄭穆)이고 손자는 정제(鄭濟), 정점(鄭漸), 정택(鄭澤), 정항(鄭沆)이다. 증손자[정항의 아들]는 「정과정곡(鄭瓜亭曲)」을 지은 정서(鄭敍)이다. 동래 정씨는 중앙 정치 무대에 나서면서 세거지인 동래를 관향으로 삼았다. 조선 시대에 17명의 상신(相臣)을 비롯해, 대제학 2명, 독서당 벼슬 6명, 공신 7명, 판서 20여 명, 문과 급제자 198명을 배출하였다.

[활동 사항]

정문도(鄭文道)는 아버지의 대를 이어 동래 지역의 호장을 지냈다. 호장이란 향촌의 실무를 처리하던 구실아치의 우두머리로, 통일 신라 말 고려 초의 지방 세력가였던 호족들이 고려의 중앙 집권 제도에 편입되면서 군사력을 잃고, 행정 실무자로 바뀌면서 생긴 직함이다. 따라서 대대로 호장을 지낸 동래 정씨는 동래 지역의 토착 세력이었음을 의미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은 “정문도는 읍에 속한 아전이었다. 세 아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고 묘는 현의 서쪽 7리에 있다”라고 적고 있다.

정문도는 고려 현종(顯宗)[재위 1009~1031] 때 동평현의 호장을 지냈으며, 지금의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양정동 북쪽 흑암리에 살았다. 늙어서 안일 호장(安逸戶長)[70세가 되어 퇴직한 호장. 안일하게 살 수 있도록 녹봉을 지급함]으로 있을 때 문득 뿔피리 소리가 들리자 마당에 엎드려 절하고는 손수 가꾼 정근을 길가에 쌓아 놓고 굶주린 행인들을 구휼하니 사람들이 감동하여 진정사(賑精詞)를 지었다. 이후로 후손이 현달(顯達)하게 되었다고 한다.

[묘소]

정문도의 묘는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양정동 469번지 화지산 동래 정씨 문중 묘역인 화지 공원에 있다. 공원 안에는 정문도의 묘와 동래 정씨 시조 묘, 재실인 추원사, 화지사 등이 있다. 정문도 묘는 명혈로 널리 알려져 조선 초기 정사(鄭賜)의 묘와 더불어 양대 정묘(鄭墓)로 일컬어지며 풍수 연구자들의 관심을 모았고, 음택 풍수 연구서에 빠지지 않고 언급되기도 한다. 동래 정씨 가문이 번창한 것은 정문도의 묘가 천하의 명당에 자리 잡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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