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16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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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文道墓 |
영어의미역 | Tomb of Jeongmundo |
이칭/별칭 | 정묘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능묘 |
지역 |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동평로 335[양정1동 464-1] |
시대 | 고려/고려 전기 |
집필자 | 전기웅 |
[정의]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양정1동 화지 공원에 있는 고려 전기 동래 정씨 2대로 안일호장을 지낸 정문도(鄭文道)의 묘.
[개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정문도는 읍에 속한 아전이었는데, 세 아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고 묘는 현의 서쪽 7리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정문도의 묘 터는 빼어난 명당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동래 정씨(東萊鄭氏)는 조선조 전 기간에 걸쳐 17명의 상신(相臣)과 대제학 2명, 호당 6명, 공신 4명, 판서 20여 명이 나왔고, 198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였는데 이처럼 명문으로 성장한 것은 정문도 묘의 음덕이라고 한다.
정문도의 무덤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고려 초에 고익공은 정문도가 동래 지역 호장으로 있을 때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로 풍수에도 일가견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화지산(和池山·華池山)[142.4m] 풍수를 볼 때마다 “좋기는 하나……”라면서 뒷말을 잇지 못하였다. 그 후 고익공은 경상도 안찰사를 거쳐 개경으로 전출되었고 정문도가 세상을 뜨자 정목은 고익공의 말이 생각나서 아버지 묘소를 화지산에 쓰도록 하였다. 상여가 화지산에 이르니 범이 쭈그리고 앉아 눈이 녹은 이상한 자리가 있으므로 거기에 장사를 지냈다.
그런데 다음 날 묘소에 가 보니 누군가 묘소를 파헤쳐 목관이 드러나 있었다. 다시 목관을 묻고 감시하는데, 삼경에 이르자 도깨비들이 나타나 말하기를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이따위 목관을 묻느냐. 적어도 금관(金棺)을 묻어야지”라고 하면서 묘를 파헤치고 사라졌다. 정목이 근심하고 있는데 한 백발노인이 나타나 “도깨비 눈에는 보릿짚이 금빛으로 보이니 보릿짚으로 목관을 싸면 다시는 묘를 파헤치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날이 새자 보릿짚으로 목관을 싸서 묻었더니 이번에는 도깨비들이 “금관이야. 이제 됐다”라면서 사라졌다. 그 후로는 다시는 도깨비가 나타나 묘를 파헤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해 여름 어느 날, 뇌성벽력이 천지를 진동하더니 황령산의 괴시암 바위가 산산조각으로 부셔졌다. 아버지의 묘소를 쓰고 난 후 정목은 개경에 있는 고익공을 찾아가 아버지를 화지산에 모셨다고 하자, 고익공이 깜짝 놀라면서 집에서 내쫓으려고 하였다. 이에 정목이 아버지의 묘를 쓰고 일어났던 일을 자세히 말하자 고익공은 그제야 안도하면서 “황령산의 괴시암이 깨졌으니 이제 그 묘소와 동래 정씨 가문의 화근이 사라졌다”면서 정목을 거두어 관직에 출사하게 하고 자기 딸과 혼인시켰다고 한다.
[위치]
정문도 묘(鄭文道墓)는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양정동 화지산 자락에 터 잡고 있으며, 흔히 정묘라고 한다. 화지 공원의 정문인 현경문을 지나면 왼쪽으로 추원사(追遠祠)와 화지사(華池寺)로 가는 길이 있고, 오른쪽으로 가면 있다. 무덤으로 가는 길에는 두 개의 연못이 있으며 연못을 지나면 약수터와 묘비, 무덤 양쪽에 천연기념물 제168호 부산 양정동 배롱나무 두 그루가 있다. 소재지 주소는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양정1동 464-1번지이다.
[형태]
약 6,612㎡의 묘역에 둘레 2.6m, 높이 3.2m로 나비형 산세에 따라 자좌 오향(子坐午向)으로 배치되어 있다. 정문도 묘 앞에는 2기의 묘비가 세워져 있는데, 하나는 1732년(영조 8)에 세운 정묘비이고, 다른 하나는 1701년(숙종 27)과 1955년에 세운 묘지비이다.
[현황]
정문도의 무덤을 비롯한 동래 정씨의 시조 묘가 있는 화지산은 동래 정씨 문중의 선산이다. 동래 정씨 문중은 묘역을 화지 공원으로 조성하고 시민들에게 무료로 개방하여 도심 내의 휴식 공간으로 활용하도록 하고 있다. 매년 동래정씨대종정에서 묘역을 단장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부산 지역의 토착 세력인 동래 정씨 가문의 시조 묘이며 천하의 명당으로 알려져 있는 정문도 묘는 풍수지리학으로나 지역사의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현재 공원으로 조성되어 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