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15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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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琪玉 |
영어음역 | Gim Giok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동구 수정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광욱 |
[정의]
부산 지역에서 활동한 노동 운동가.
[활동 사항]
김기옥(金琪玉)은 1919년 3월 8일 울산광역시 울주군 청량면에서 태어났다. 1954년 11월 부산부두노조 위원장에 선출된 것을 시작으로 노동계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1955년 9월 대한독립촉성전국노동총동맹[약칭 대한노총]과 전국자유연맹이 통합된 것을 계기로, 전국부두노동조합은 대한독립촉성전국노동총동맹의 핵심 세력으로 부상하였다. 이에 김기옥은 전국자유연맹을 장악하고, 이를 기반으로 대한독립촉성전국노동총동맹 전국자유연맹의 연맹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1957년 6월 그는 대의원 대회를 통해 부산부두노조의 체제를 바꾸었는데, 그것은 집행부와 감찰부의 이원 체제를 폐지하고 감찰 기능을 흡수한 집행부 일원 체제를 도입하는 것이었다. 이는 자신의 세력 기반이던 부산부두노조를 확실하게 장악하기 위한 것으로, 이 과정에서 반대 세력은 징계권을 발동해 축출하였다. 이어서 대한독립촉성전국노동총동맹 12·19 통합 대회에서 그는 5인의 최고위원 중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고, 1958년의 전국 대회에서는 대한독립촉성전국노동총동맹 위원장이 되었다. 바야흐로 김기옥은 한국 노동계의 최고 실력자가 되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는 부패한 사조직과 밀착되었으며, 집권 여당인 자유당의 보호 하에 권력 남용과 비리를 저질렀다. 이에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나자 대한독립촉성전국노동총동맹과 김기옥에 대한 노동계의 분노가 폭발하였다. 부산에 있던 김기옥의 집은 성난 노동자들의 습격으로 파괴되었으며, 부산부두노조에서는 수습위원회가 만들어져서 김기옥 세력을 축출하기 위한 투쟁을 강력하게 전개하였다. 김기옥은 정화위원회를 만들어 대항했지만, 부산부두 노동자의 강력한 반발과 저항에 부딪쳐 결국 부산부두노조에서 손을 떼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