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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1377
한자 金井鎭
영어의미역 Geumjeonghin in Busan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부산광역시 금정구|동래구|연제구|해운대구|기장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주영택

[정의]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정산성에 있던 조선 후기의 군진.

[제정 경위 및 목적]

1704년(숙종 30) 조정에서 금정산성을 지키기가 어려워 별도의 군사 지휘 체계를 마련하게 되었다. 1707년(숙종 33) 동래 부사 한배하(韓配夏)는 전 도사(都事) 최달선(崔達善)을 금정진(金井鎭)의 책임자인 초대 중군에 임명하였고, 중성(中城)을 축조하면서 금정산성을 관리하기 위해 좌기청 6칸, 좌우 행랑(行廊) 각 5칸, 군기고(軍器庫) 4칸, 화약고 1칸, 내동헌 3칸, 별전청 4칸 규모의 관아를 만들었다.

[관련 기록]

『숙종실록(肅宗實錄)』 권40, 숙종 30년[1704] 9월조에 “금정산성은 축조된 직후부터 지나치게 크고 넓어 지키기 어렵다”라며 대책을 논의한 기록이 있고, 『경상도 읍지(慶尙道邑誌)』 동래부 성지조(城池條)에 금정산성을 “1714년(숙종 40)에 혁파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으며, 『동래부지(東萊府誌)』[1740] 성곽조(城郭條)에 “금정산성의 중군소(中軍所)는 승장소(僧將所)에 앞서는 산성의 최고 지휘부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변천]

1713년(숙종 39) 판결사 이정신(李正臣)의 건의에 의해 마련된 금정산성 승군 작대(僧軍作隊)는 국청사·해월사의 승군 100여 명을 기간 병력으로 삼고, 범어사의 승군 300명을 비롯한 양산·기장의 승도를 모두 편제하니 그 규모는 800명 정도로 추정된다. 『동래부지』 군총(軍摠)조에 316명으로 되어 규모가 축소되었고, 1868년(고종 5) ‘경내(境內) 각 사(各寺)의 승도를 성안(成案)한’ 기록에는 승군 작대의 규모가 101명으로 크게 줄었다. 이 무렵의 승군 작대는 더 이상 금정산성의 승군을 주로 하지 않았고 점차 둔민(屯民)이 담당하였다.

1714년 금정산성이 매우 넓고 커서 지키기가 어렵다는 문제로 금정진을 혁파하였고, 1824년(순조 24) 동래 부사 이규현(李奎鉉)은 금정산성을 관장하는 책임자로 별장을 배치하였다. 이 별장은 왜관의 설문장(設門將)에 차임(差任)되었던 동래부의 수교(首校) 3명 가운데 오래 근무한 자를 가려 뽑아 차례대로 부임하도록 하였다. 금정산성의 경영을 전담하는 금정진 별장의 관할 구역은 동래부와 양산군, 기장현이었다.

별장이나 중군의 지휘 하에 금정산성을 수리하고 관리한 집단은 원래 승려들이었다. 별장은 승역(僧役)이 해제된 상황에서 둔전(屯田)을 설치하고 둔민을 관리하는 업무를 담당하였다. 19세기 초엽의 둔전은 106마지기이었는데, 1867년(고종 4)에 이르러 1,186마지기 내외에 달하였다. 둔전이 마련되면서 둔민이 산성에 입주하기 시작하였다. 둔민이 확대됨에 따라 인구도 크게 증대하였다. 이는 금정산성의 공해·중리·죽전·아문 등의 마을이 19세기 초엽에 점차 발전하는 과정이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1895년(고종 32) 진관(鎭管)의 해체로 금정진도 폐지되었다.

[의의와 평가]

금정진의 제도적 변화에 따라 일반민을 수용하는 둔민이 확대되자 금정산성 내의 인구도 크게 증대되었다는 사실은 금정산성 주민의 유래와 변화를 알려 주는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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