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67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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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海月寺- |
영어의미역 | The Site of Haewalsa Temple |
이칭/별칭 | 해월사지 |
분야 | 지리/인문 지리,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지명/고지명 |
지역 |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성동 금정산성 내 부산학생교육원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윤용출,주영택 |
[정의]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성동에 있었던 조선 후기의 절터.
[명칭 유래]
해월사(海月寺)의 명칭이 유래된 해월(海月)의 어원은 「해월사 중창 상량 기문」에 “바다에 달이 밝아서 그림자가 없는데[해월등무영(海月登無影)], 홀로 노니는 고기가 스스로 미혹하였다[유어독자미(遊漁獨自迷)]”라고 한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형성 및 변천]
조선 후기 각 지방의 군사적 방어 시설로 산성이 축조되면서, 승병을 배치하는 일이 많았다. 1703년(숙종 29) 동래 금정산성을 축조한 직후에 국청사(國淸寺)와 해월사(海月寺)가 함께 성내에 개창된 것은 산성을 지키는 승영(僧營)으로 활용하기 위한 관부의 목적에 따른 것이었다. 국청사는 1703년에, 해월사는 5년 뒤인 1708년(숙종 34)에 건립되었다
국청사는 금정산성의 서문 안에, 해월사는 남문 안에 조성되었다. 현재까지 산성 내에 남아 있는 국청사에는, 철제의 ‘금정산성 승장인(金井山城僧將印)’이 보존되어 있다. 국청사와 해월사의 승병을 중심으로 편성된 금정산성 승군 작대(僧軍作隊)는 산성 수호를 위해 마련된 승병 조직이었다.
승군 작대가 설치된 것은 1713년(숙종 39)의 일로서, 당시 판결사 이정신(李正臣)의 건의에 따른 것이다. 이정신은 동래 금정산성의 완축을 위해 10년에 걸친 단계적 축성론을 제시하였으며, 아울러 이곳의 파수 군병으로서 동래·기장·양산 소속의 군병을 획급해 줄 것, 그와 함께 산성 안에 있는 두 사찰인 국청사와 해월사의 승도 100여 명 뿐 아니라 인접한 범어사의 승도 약 300명 등을 합쳐서 승군 작대를 편성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들 승군을 수합하여 성곽을 지키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정신의 제안에 따라 금정산성 승군 작대가 조직되었다. 『동래부지(東萊府誌)』(1740)의 군총조에 기재되어 있는 승작대의 규모는 316명이었다.
1867년(고종 4)의 『동래부사례』에서는 금정산성 승작대의 규모가 101명으로 줄어든 것을 보여 준다. 19세기 초엽 이래 국청사와 해월사의 승영 규모는 크게 줄어들게 되었다. 특히 해월사는 승영의 기능을 거의 상실해 가고 있었고, 국청사는 사찰의 규모가 대폭 축소된 채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1795년(정조 19) 해월사는 새 터에 중건되었다. 금정산성의 남문 안에 있던 해월사는 1832년(순조 32) 무렵의 『동래읍지』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해월사는 19세기 초반 경에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위치 비정/행정 구역상의 구분]
해월사의 위치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동래부지』 불우 편에는 금정산성 남문 내, 『동래읍지』(1832)에는 북문 내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현재 해월사 상량 기문과 현판을 소장하고 있는 지금의 정수암 일대를 해월사 터로 보기도 한다. 창건 이후 이건의 가능성도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관련 기록]
『동래부지』 불우 편, 『동래읍지』[1832], 『교남지(嶠南誌)』[1937]에 나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