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9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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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安長遠 |
영어음역 | An Jangwon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 1042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장선화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안장원(安長遠)[1924~1971]은 1924년 1월 9일에 당시 경상남도 울산군 온양면 덕신리 516번지[현 울산광역시 울주군 온산읍 덕신리]에서 태어났다. 1936년 동래중학교[현 동래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동래중학교 5학년에 재학 중이던 1940년 11월 21일과 22일 경상남도 연합 군사 대연습이 시행되었고, 11월 23일 부산 공설 운동장[현 구덕 운동장]에서 제2회 경상남도 학도 전력 증강 국방 경기 대회가 열렸다. 이날 일본인 심판들은 일본인 학교인 부산중학교를 우승시키기 위해 입장 절차부터 경기 내용에 이르기까지 편파적으로 진행하였다. 대회의 심판장인 노다이[乃台] 대좌가 이런 부당한 경기 진행을 총지휘하여, 결국 동래중학교에 돌아가야 할 우승을 부산중학교가 차지하게 되었다.
부산제2상업학교와 동래중학교 학생들은 이에 항의하여 폐회식 참여를 거부하였으나, 학교 당국의 강력한 권유로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학생들이 폐회식에서 대회의 부당성을 항의하고 「아리랑」 등 민요를 부르며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기에 이르자, 폐회식장은 일본인에 대한 총공격장이 되었다. 나아가 안장원은 1,000여 명의 학생들과 함께 운동장 입구에서 다시 집결하였고 시가행진을 하여 영주동에 있는 노다이의 관사를 공격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일본 헌병들은 귀가하는 학생들 200여 명을 체포하였고, 주동자로 지목된 11명은 구속 기소되었다. 이 때 안장원도 구속 기소되어 1941년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8월을 선고 받았다. 1941년 8월 25일 대구복심법원에 항소하였으나 마찬가지로 징역 8월형을 선고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으며 1942년 3월 중순에 출감하였다. 1971년 2월 19일에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3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