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14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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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銑甲 |
영어음역 | Gim Seongap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275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장선화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김선갑(金銑甲)[1921~1942]은 1921년 9월 29일 경상남도 창원군 천가면 대항리 200번지[현 부산광역시 강서구 대항동 200번지]에서 태어났다. 1937년 부산제2상업학교[구 부산상업고등학교, 현 개성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부산제2상업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1940년 11월 23일 부산 공설 운동장[현 구덕 운동장]에서 열린 제2회 경상남도 학도 전력 증강 국방 경기 대회에 참가하였다. 이날 일본인 심판들은 일본인 학교인 부산중학교를 우승시키려고 입장 절차부터 경기 내용에 이르기까지 편파적으로 진행하였다. 이 대회의 심판장인 노다이[乃台] 대좌가 이런 부당한 경기 진행을 총지휘하여, 결국 동래중학교[현 동래고등학교]에 돌아가야 할 우승을 부산중학교가 차지하게 되었다.
부산제2상업학교와 동래중학교 학생들은 이에 항의하여 폐회식 참여를 거부하였으나, 학교 당국의 강력한 권유로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학생들이 폐회식에서 대회의 부당성을 항의하고 「아리랑」 등 민요를 부르며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기에 이르자, 폐회식장은 일본인에 대한 총공격장이 되었다. 이때 김선갑은 1,000여 명의 학생들과 함께 운동장 입구에서 다시 집결하여 시가행진을 하여 영주동에 있는 노다이의 관사를 공격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일본 헌병들이 귀가하는 학생 200여 명을 체포하였다. 김선갑은 이 사건의 주도자로 지목된 11명 가운데 한 명으로 검거되었다. 1941년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8월형을 선고 받고, 1941년 8월 25일 대구복심법원에 항소하였으나 마찬가지로 징역 8월형을 선고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42년 3월 하순에 출옥하였지만, 조사 과정에서 일본 경찰에 받았던 잔학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출옥한 지 2주 만인 1942년 4월 5일에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3년에 건국 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