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9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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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達熙 |
영어음역 | Yi Dalhui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장선화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이달희(李達熙)[1920~1994]는 1920년 9월 29일에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대산면 일동리 347번지에서 태어났다. 1936년 동래중학교[현 동래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동래중학교 5학년에 재학 중이던 1940년 11월 23일 부산 공설 운동장[현 구덕 운동장]에서 열린 제2회 경상남도 학도 전력 증강 국방 경기 대회에 참가하였다. 이날 일본인 심판들은 일본인 학교인 부산중학교를 우승시키려고 입장 절차부터 경기 내용에 이르기까지 편파적으로 진행하였다. 대회의 심판장인 노다이[乃台] 대좌가 부당한 경기 진행을 총지휘하여, 결국 동래중학교에 돌아가야 할 우승을 부산중학교가 차지하게 되었다.
부산제2상업학교와 동래중학교 학생들은 이에 항의하여 폐회식 참여를 거부하였으나, 학교 당국의 강력한 권유로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학생들이 폐회식에서 대회의 부당성을 항의하고 「아리랑」 등 민요를 부르며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기에 이르자, 폐회식장은 일본인에 대한 총공격장이 되었다. 이때 이달희는 1,000여 명의 학생들과 함께 운동장 입구에서 다시 집결하였고 시가행진을 하여 영주동에 있는 노다이의 관사를 습격하였다.
소식을 들은 일본 경찰과 헌병이 출동하여 200여 명의 학생을 체포하였으며, 주동자로 지목된 11명이 기소되었다. 이때 이달희도 체포되어 1941년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8월형을 선고 받았다. 대구복심법원에 항소하였으나 마찬가지로 징역 8월을 선고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으며 1942년 출옥하였다. 이 사건으로 동래중학교에서 퇴학되었으나, 해방 후 동래중학교의 명예 졸업장을 받았다. 1994년 3월 15일에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3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