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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0769
한자 金明洙
영어음역 Gim Myeongsu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장선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출생 시기/일시 1922년 7월연표보기 -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36년 - 동래중학교 입학
활동 시기/일시 1940년 11월 23일 - 노다이 사건 참가
활동 시기/일시 1940년 11월 24일 - 체포됨
활동 시기/일시 1941년 8월 25일 - 징역 8월형을 선고 받음
활동 시기/일시 1942년 3월 - 출옥
몰년 시기/일시 1942년 3월연표보기 - 사망
관련사건 시기/일시 1940년 11월 23일연표보기 - 노다이 사건
출생지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
학교|수학지 동래중학교 - 부산광역시 동래구 칠산동 360지도보기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김명수(金明洙)[1922~1942]는 1922년 7월에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에서 태어났으며 1936년 동래중학교[현 동래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김명수동래중학교 5학년에 재학 중이던 1940년 11월 21일과 22일 경상남도 연합 군사 대연습이 시행되었고, 11월 23일 부산 공설 운동장[현 구덕 운동장]에서 제2회 경상남도 학도 전력 증강 국방 경기 대회가 열렸다. 이날 일본인 심판들은 일본인 학교인 부산중학교를 우승시키려고 입장 절차부터 경기 내용에 이르기까지 편파적으로 진행하였다. 대회의 심판장인 노다이[乃台] 대좌가 부당한 경기 진행을 총지휘하여, 결국 동래중학교에 돌아가야 할 우승을 부산중학교가 차지하였다.

부산제2상업학교와 동래중학교 학생들은 이에 항의하여 폐회식 참여를 거부하였으나, 학교 당국의 강력한 권유로 어쩔 수 없이 참여하였다. 그러나 학생들이 폐회식에서 부당성을 항의하고 「아리랑」 등 민요를 부르며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기에 이르자, 폐회식장은 일본인에 대한 총공격장이 되었다. 나아가 김인규(金麟圭)는 1,000여 명의 학생들과 함께 운동장 입구에서 다시 집결하여 시가행진을 해서 영주동에 있는 노다이의 관사를 습격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일본 헌병들이 귀가하는 학생 200여 명을 체포하였으며, 김명수는 다음날인 11월 24일 체포되었다. 주동자로 지목된 11명 가운데 동래중학교 학생은 9명이었으며, 김명수는 주동자로 지목을 받고 구속되어 재판을 받았다. 1941년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8월형을 선고 받고 1941년 8월 25일 대구복심법원에 항소하였으나 마찬가지로 징역 8월형을 선고 받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42년 3월 중순에 출옥하였지만, 조사 과정에서 일본 경찰이 자행한 잔학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출옥한 지 2주 만인 3월 말에 사망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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